Ep9. 즐겁고 불안했던 맨체스터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happier!

2023.10.19 | 조회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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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0.18.

 

어딘가 어수선한데, 돌아다니는 내내 묘하게 신이 나고, 대단한 볼거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절대 지루하진 않은 이상한 도시. 험난했지만 그래서 잊지 못할 기억들을 안고 돌아온 지난 토요일의 맨체스터.

딤섬이 먹고 싶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찾아간 도심의 중식 레스토랑, 난잡한 큐레이션 덕에 볼 만한 작품들은 많았던 미술관, 도서관에 입장해야 해서 반을 버려 버린 싸구려 커피, 영국 3대 도서관 안에 든다는 존 라이랜즈 도서관, 걷다가 나도 모르게 신이 났던 축축한 딘스게이트 거리, 축구의 축 자도 모르면서 흥분되던 유니폼샵, 갑자기 내리는 비로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쓴 채 구경한 대성당. 뭐 하나 미치도록 아름답거나 못 잊게 좋았던 곳은 없으면서도 재미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 도시였다. 맨체스터는 축구 직관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추천하지 않는 여행지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는 거다. 역시 뭐든 겪어봐야 아는 법인 것이겠고, 새로운 것이라면 재미있든 없든 경험해봐서 나쁠 것도 없겠다. 그러나 맨체스터에서 보낸 하루의 진정한 재미는 그 뒤부터였던 것 같다.

해가 지고 맨체스터 공항 근처에 잡아둔 에어비앤비에 도착했다. 작동하지 않는 도어락과 몇 분 씨름하다가 들어간 방은 충격적인 위생 상태였다. 언제 빨았는지 가늠도 안 되는 쿠션들, 머리카락과 먼지, 셋이서는 도저히 잘 수 없는 크기의 좁은 두 침대까지. 어이없는 상황에 웃으면서 배드버그 스프레이를 마구 뿌리던 중에 호스트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방 청소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니 다른 방으로 교체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다행스러워하면서 들어간 새 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철제 이층침대는 무서울 정도로 삐걱거리고, 지저분한 인형들과 잡동사니들이 침대 밑과 옷장에 처박혀 있고, 무엇보다 방에 잠금장치가 없었다공용 화장실도 왠지 찝찝해서 셋 다 샤워를 포기하고 세수만 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모든 것이 너무나 엉망이어서 오히려 신나는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히터를 작동시키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스위치가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호스트도 메시지에 답장이 없었고, 나는 정말 호기롭게 옆 방 투숙객에게 히터 작동법을 물으러 갔다. 작게 노크를 했더니 몇 초 있다가 문이 천천히 열렸다. 키 크고 머리숱 적은 백인 남자가 누가 봐도 마약을 한 듯한 멍하고 언짢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너무 무섭고 당황해서 말문이 턱 막혀 “Sorry... Do you know how to turn on the ra... ra... radia... radiator?”이라고 해버렸다. 그 남자가 “I... don't... know.”라고 무섭도록 천천히 대답했고 나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Okay. Thank you.” 하고서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문제는 히터가 아니게 됐다.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던 그 사람이 실수로든 고의로든 우리 방에 들어올까 봐 문을 의자로 막고 그 위에 백팩, 담요, 아령을 올려서 문고리를 최대한 고정했다. 경찰에 신고할 상황에 대비해 휴대폰 메모장에 숙소 주소와 호스트 전화번호를 복사해두고, 겉옷을 껴입고서 비좁은 일층 침대에 셋이 나란히 누웠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문밖에서 큰 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방문을 열려는 줄 알고 심장을 졸였다. 벽 너머로 새는 음악 소리에도 청각이 곤두섰다.

이제 정말 자자고 한 뒤에 몇 분이 흐르고서, 제아가 이건 그냥 위기대처 매뉴얼인데,”라며 침묵을 깼다. 해외에서 유용한 위기대처 팁이 있나 했는데 만약에 누가 정말 문을 열려고 하면 나랑 수민 언니가 문을 막고, 내가 경찰에 신고하고, 한이 언니는 호스트한테 전화를 해.”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두근거리게 무서운 상황에서도 지금 이 대화들이 나중에 얼마나 우습고 귀엽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될까 싶었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이라던 문장을 조금 수정해서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happier’이라고 해도 되려나. 부산스럽게 오바를 떨던 우리는 피로했던 여정에 생각보다 금방 잠에 들었고, 역시나 밤중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투숙객들이 잠든 새벽에 숙소를 빠져나와 아침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했다. 거짓말처럼 평온하고 어두운 하늘에 별이 한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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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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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nrin

    0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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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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