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청명하고 혼란한 런던

잠깐 살고 떠날 사람

2023.10.14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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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교환학생 일기.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2023.10.11

 

영국에서 처음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는 런던까지 기차로 가는 것보다   이상 싸고   오래 걸린다.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까 정말 영국에서 사 사람이  느낌이었다. 가는 내내 책을 읽던 옆자리 백인 아저씨도 여정이 설레는지 핸드폰으로 차창  사진을 찍더라.  좌석과의 간격도 좁고 아저씨는 자꾸만 실수로  무릎을 쳤지만, 처음은 언제나 설레는 법인 건지 그게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빅토리아 스테이션에 내려 점심 먹고 자연사 박물관에 가는데 햇살이 좋아서 은근히 들떴다. 날씨가 흐린 나라에 산다는  그만큼 화창한 날을  기뻐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커피를 사들고서 켄싱턴 가든에 갔다. 수민이, 제아와 연못가에서 해가  때까지 앉아 있었다. 런던에서는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곳에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돌아올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밤에 숙소에 짐을 두고 나와서 근처 펍에 갔다. 온갖 스포츠 프로그램들을  틀어주는, 현지인들만   같은 분위기의 가성비 좋은 술집이었다. 널찍한 테이블에 도로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와인과 감자튀김을 먹었다. 동양인 여자 셋이서  늦게 이곳에 오는 경우는 드물 듯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술을 따라주던 직원이 “Can I ask you a question?”이라며 제법 본격적인 어투로 나를 긴장시키더니 ”Where are you from?”이라고 싱거운 질문을 하더라. 지극히 이방인인 느낌이 묘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수민, 제아와 텐텐오락실 앱으로 술게임을 해서 혼자 침대  사람을 정했다. 승자는 이제아. 그러다 갑자기 영어로만 대화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어로 말하려니까 진지한 이야기도 우습고 쿨하게 할 수 있겠더라금방 알딸딸해져서 나에 대한 이야기들도 술술 나왔는데 돌이켜보아도 그리 후회되지 않는다여행지의 술집이 아니라면 어디서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랴 하는 생각이 많은 말들을 허락해주었다.

지난 번엔 런던 중심부의 남동쪽에 위치한 버몬지에서, 이번 여행은 켄싱턴에서 묵었으니 도심의 끝과 끝에 묵어본 셈이다. 얼마  런던 여행 블로그를 찾아보다가 부촌인 노팅힐 근처에 묵는  관광객들에게는 안전하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블로그를 읽고 이번에는 켄싱턴에 숙소를 잡았지만, 한편으로는 여행 정보를 너무 많이 찾아보는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을  같단 생각이 들더라. 가성비 좋고 깔끔했던 이번 호텔도 좋았지만 나는 9월로 돌아가도 버몬지의 외진 에어비앤비에 묵기를 택할  같다. 만약  블로그를 출국 전에 보게 됐었다면, 버몬지의 숙소를 택할 이유도, 숙소부터 타워 브릿지까지 걸어간 뒤에 템스 강을 건너는 설렘을 느낄 수도, 에어비앤비 호스트님의 추천을 받아 맛있는 브런치 카페에  기회도 없었겠으니. 여행 정보를 꼼꼼히 찾아보고 떠나는  도움이  때가 많지만 역시 언제나 좋기만  것은  없는 거다. 때로는 바보 같은 선택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세상에는 무한한 선택지가 있고, 현명해 보이는 선택의 뒷면에 내가 모를 우매함이 있고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의 뒷면에 뜻밖의 슬기로움이 있다. 그래서 숙소부터 식당까지 선택의 연속인 여행은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지를 따지는  그런 계산이 반드시 내가 예견한대로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 주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의 반복이 싶다.

둘째날 아침엔 버스를 타고 포토벨로 로드 마켓에 갔다. 날씨가 영국에  이후로 가장 좋았다. 우리 학교에서  교환학생들만 있는 단톡방에 누가 오늘 날씨가 미쳤어요라고 보낼 정도로 해가 쨍쨍했다. 영국에서만큼은 귀한 햇살 아래에서,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구경하고, 오아시스와 테일러 스위프트 엘피를 뒤적이고, 노팅힐 북샵에 찾아가고, 친절한 직원이 일하던 가게에서 브런치를 먹고, 버스를 타고 소호로 향했. 쇼핑을  하고 트라팔가 광장과 빅벤까지 걸어 내려오는 내내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았다.   여행을 다녀보니 이제  여행 취향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트인 공원이나 유적지, 나무가 우거진 길이나 작은 상점들이 줄지은 거리 같은 데가 좋다는 . 발걸음 조급한 관광지의 만보객이 되는 일보다는 조금 촌스럽고 평온한 곳에서 걷고 쉬는 일이 외려  세련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번 여행 때는 리젠츠 공원과 프림로즈힐에 가보고 싶었지만 노을 지는 템스 강을 따라 시간 가는  모르게 걷다 보니 기차 시간이  되어 가지 못했다. 다음  런던은 노을 지는 프림로즈힐을 위해 와야지.

영국에  뒤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고 싶은  발견해도 어차피 5개월 뒤면 떠날 몸이라 생각하니  사지 않게 된다. 나중에  이고  짐이 되거나 버리고 가야  쓰레기가  거라고 생각하면,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일이 어려워져서 그냥 사지 않기를 택해버리게 된다. 그간 한국에서 얼마나  고민 없이 안일하게 소비하고 버리고 다시 소비하기를 반복했나 그런 생각을 영국에  후로 정말 많이 했다. 40 살이 넘은 지구에게는 내가 사는 100년이나 5개월이나 똑같을 텐데 여기에 와서야  땅을 잠깐 살고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지내게  거다. 여하튼 영국에 지내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환경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같다. 이렇게 많은 교환학생들이 여기에 와서 살  있는 것들은 굳이 사오지 말라 조언에 이끌려 똑같은 물건을  소비하게 되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데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실한 분리수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패스트패션 기업들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데 라이프스타일 환경주의가 무슨 효용이 있나. 그런 회의적인 생각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혼란하고 사람 많은 런던에 오니  그런 생각이 들었네. 복잡 미묘한 생각들을 갖고 셰필드행 기차를 탔다. 이젠 좋은 것만 보일 시기는 지났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지나치게 감상적인 자세를 벗어날 때가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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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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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수빈

    0
    about 1 year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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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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