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8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곳에서 종종 알 수 없는 조급함을 느끼는데 그럴 때마다 린이가 해준 말을 떠올리고 있다. 주변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나의 취향과 페이스에 맞추어 지내면 된다고 했던 그 말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잘 붙들어준다.
그렇게 균형을 잘 잡으며 지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제 오늘은 몸도 마음도 조금 피로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네. 영국에 온 이후로는 웬만하면 잠도 잘 자고 하루를 사는 일이 싫지 않았는데 어제는 그렇게도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 말을 되뇌려고 한참 애썼다. 좋은 날들 사이에 이렇게 가끔 침잠하는 듯한 하루들이 껴 있겠지 싶다. 가져온 편지들을 오랜만에 꺼내 읽다가 ‘나는 너를 아주 잘 알 것 같을 때만큼이나 네가 낯설게 느껴질 때 좋거든.’ 이 문장에서 멈추어 읽고 또 읽었다. 네가 날 낯설게 여길 때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것 같을 때 나는 좋다. 네가 잘 아는 나는 아직도 종종 우측통행을 하고, 식당에서 땡큐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를 해버리고, 발로 이불을 뒤적거리면서 곰돌이를 찾고, 오늘처럼 가라앉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 우리가 함께 있는 꿈을 꾸다가 깬다.
이렇든 저렇든 나는 잘 지낸다. 편두통이 몰려오는 지금도, 가장 자유롭고 복된 순간을 지나 보내고 있다는 확신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잘 지낸다. 가끔은 잘 지내고 싶어서 나에게 최면을 걸듯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랴. 여기서 만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같이 지내는 수민이와 제아가 정말 큰 의지가 된다. 원래 알던 사이처럼 손발이 잘 맞아서 부부 같다는 농담도 한다. 가벼운 만남도 무겁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내 욕심이 헛된 욕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미없는 영국 조크보단 한국어로 하는 아무 말이 더좋다는 대화를 나누는 거, 가고 싶은 여행지나 그리운 한식을 줄줄이 읊는 거, 수강정정이나 계좌 관리 같은 사소한 문제를 제 일처럼 서로 고민해주는 거, 저녁 메뉴를 함께 정하고 귀갓길에 같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가는 거. 그런 사소한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생각 이상으로 큰 위로다. 자유로움과 외로움은 한 끝 차이이니 자칫하면 방치당한 것처럼 외로워지기 십상일 이곳에서, 내가 적당한 자유로움과 동시에 안정감을 갖고 지낼 수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오늘은 셰필드 조금 아래 위치한 노팅엄에 다녀왔다. 로빈 후드의 도시라는 점 말고는 딱히 특징적일 게 없다고 들은 노팅엄은 노잼도시이면서도(노팅엄에 있는 동안 제일 재미있었던 건 아시안게임 한국 축구 금메달 소식이었다) 나름의 울림이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로빈 후드가 상징적인 도시여서인지는 몰라도 전반적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려서 처음 마주한 시의회 의사당에는 ‘Black History Month - Nottingham Together’이라 적힌 큰 현수막이 간판처럼 걸려 있었고, 노팅엄 현대 미술관의 작품들은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를 다룬 난해한 미디어 아트들이 대다수였다. 영국의 옛 감옥과 법정을 재현해 놓은 내셔널 저스티스 박물관은 단순히 수감자들의 삶을 대상화하듯 전시하기보다는 범죄의 사회학적인 의미와 수감자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러모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의 일상을 살고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월라튼 파크와 가장 보고 싶었던 노팅엄 캐슬에 들어가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디든 아쉽게 돌아올 때는 다시 돌아갈 이유를 남겨두고 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친 채로 기숙사에 돌아온 뒤에 수민이와 각자 방에 들어가면서 내가 무기력해 보였는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까 뭐든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라고 해주더라. 그게 잘 안 되어서 벌써 열두 시를 넘기긴 했지만. 잠이 안 오고 머리가 복잡해서 보름 전 쯤에 서점에서 사온 Wendy Cope 시집을 꺼내 읽었다. ’feel like a light-bulb that cannot switch itself off’라는 구절이 지금의 심정 같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까 얼른 스위치를 내리고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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