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7
지난주 일요일에는 혼자 오후 내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12km를 넘게 걸었다. 기숙사에서 도보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엔드클리프 파크에 갔는데 여유롭고 평화롭고 너무 좋더라. 엄청 큰 검은색 강아지랑 발이 따끈한 조그만 강아지랑도 놀아주고 오리 밥 주는 것도 구경했다. 트로이 시반 Heaven 뒤에 레이니의 pink skies가 자동 재생으로 흘러나오는데 너무 좋았다.
날이 춥고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안 파는 카페도 있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자주 사 먹게 된다. 쌀쌀해서 그런지 따뜻한 커피를 들고 걸을 때 그냥 걸을 때보다 마음에 조금 더 안정감이 생긴다. 웬만하면 테이크아웃을 하게 되니까 텀블러를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여하튼 스코틀랜드 속담에 Today’s rain is tomorrow’s whisky라는 속담이 있다는데 여기도 해당되는 듯하다. 우중충하다가도 거짓말처럼 화창해지고, 한없이 맑다가도 비가 쏟아진다. 날씨가 시간대별 예보와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영국에 오면 날씨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딱히 그렇진 않고 좀 흐려도 언젠가 개겠지 생각하게 된다.
어제 아침 아홉 시에 ‘Men, Feminism, and Gender Relations’ 첫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같이 듣는 일본인 친구와 말을 트고선 한국이나 일본이나 젠더 관련 수업을 수강하기 어렵다는 대화를 나눴다. 첫날인데도 평가 방식 안내만 해주시고 바로 강의가 진행됐다. 헤게모니적 남성성, 해체주의 페미니즘, 상호교차성같이 한국어로는 조금이나마 익숙했던 용어들도 영어로 배우려니까 생경하기만 하더라. 노트북을 듀얼 창으로 열어두고 왼쪽에는 강의안, 오른쪽에는 영어 사전을 띄워두고서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다. 뒷자리 학생들에게 보일 것이 좀 부끄럽긴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너무 설레고 재미있었다. 네 차례의 큰 페미니즘 물결에 대해서 논문이 아니라 수업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운 게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수업 시간에 헤게모니적 남성성 위계 구조로부터 주변화된 남성들에 대해서, 혹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남성성이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룰 일도 없었다. 철학과 사회학 전공인데도. 내가 스스로 잘 번역된 오류 없는 텍스트를 찾아서 어쭙잖은 지식 모아가며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라 교수가 떠먹여주는 강의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엄청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미치도록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고 생각했다.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마음 한편에 지니고 있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렇게 문득문득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싫은 순간들이 있다. 돈 다음으로 하나의 인생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사는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장소는 기회를 빼앗고 어떤 장소는 기회를 주니까. 복습 같은 건 한국에서도 안 하던 짓인데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강의안을 복습하면서 필기를 했다.
기숙사에서 좀 쉬다가 ‘Ethics’ 수업을 들으러 갔다. 세 시 수업인데 50분이 되도록 강의실에 나뿐이다가 5분쯤 지나서 선하게 생긴 영국인 학생 하나가 Ethics 수업 들으러 온 거 맞냐고 하며 들어왔다. 영국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친절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쌀쌀맞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는데 이 친구는 살갑게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열심히 스몰토크를 했다. 심지어 몇 살이냐고 먼저 물어보는 영국인이 처음이어서 잘못 들은 줄 알고 나이 물은 거 맞냐고 되물었다. 만 나이로 열아홉에 2학년인 런던 출신 조셉... 말이 조금 빨라서 도중에 도저히 못 알아듣겠길래 조금만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건물 구조가 복잡해서 사람들이 강의실 찾기가 어려워 늦는 거 아닐까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철학과 학생으로 추정되는 분이 강의실에 들어오시더니 학교 파업으로 수업 취소됐다고 알려주셨다. 조셉이랑 “Really..?”만 연발하고 헛웃음 치면서 같이 강의실을 나왔다. 셰필드 생활 어떻냐고 묻길래 여기 오기 전에 일주일 여행한 런던이 너무 좋았어서 여기는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런던 출신이라길래 그렇게 말한 것도 있고 실제로도 좀 그렇기도 하고.
건물 나오는 길에 마주친 재민 오빠랑 중국집에 가서 마라탕에 꿔바로우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여기에 오니까 엄청 여유로워지고 계획해두었던 하루하루의 루틴이 흐트러지는 것에 관대해진다는 말을 들으면서 무지 공감했다. 우연히 누굴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하고 무얼 먹든 어딜 걷게 되든 괜찮을 것 같다. 일부러 돌아가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도 좋다. 아직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금방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한국보다 이곳이 나에게 더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고서는 Tea Society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학생회관에 갔다. 떡볶이와 아이즈원을 좋아한다는 동갑내기 일본인 여학생, 역사학 전공의 영국인 새내기 남학생 등 여러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차를 마셨다. 그러다 소파에 앉아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차를 마시던 친구가 창밖 풍경과 너무 잘 어울리길래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You look great in this view. Can I take a picture of you?” 하고서 핸드폰을 받아 사진을 찍어줬다. 머쓱한 웃음이 여느 한국인 같아서 웃겼다. 한국에서라면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말았을 텐데 안 하던 짓을 하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우습고 또 유쾌하다.
지금은 영국 시간으로 수요일 오후 다섯시 반, 혼자 크룩스 밸리 파크와 서점에 갔다가 플랫메이트 수민이가 추천해 준 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오늘 낮엔 영국 로즈뱅크 석유가스전 사업에 항의하는 환경 시위에 쓸 포스터를 제작하는 세션에 다녀왔다. 대여섯 명밖에 모이지 않았는데 지난 세션보다 많이 모여서 좋다는 얘길 들으면서 참 남일 같지 않더라. 정정헌 활동을 하면서 한두 명 입부 해오면 다행스러워하던 내 모습과 겹쳐 보여서 씁쓸하게 웃겼다.
아무튼 셰필드는 관광 도시가 아니어서 내 발로 돌아다니지 않으면 고여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자꾸 보고 느끼고 경험할 것을 이곳저곳 찾아다니는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일이 추석이라느니 이재명 구속영장이 기각됐다느니 한국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소식들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오늘의 일들을 돌이키고 내일 걸어볼 곳을 정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저녁밥을 해먹는 것만으로 하루가 꽉 찬다. 기숙사 방음이 전혀 안 돼서 플랫메이트들이 문을 여닫을 때마다 놀란다는 점과 며칠 전에 당한 캣콜링을 제외하면 나쁠 것 없이 지내고 있다. 내가 영국 영어를 절반도 못 알아듣는다는 점도 있지만 그건 나쁘기만 한 점은 아니겠다. 가끔은 남의 말이 다 들려서 불쾌하기도 하듯이 분명 못 알아들어서 편한 것이 있겠다고 생각해버리는 중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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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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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의 에피소드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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