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구점에 갈 일이 많습니다. 다양한 종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새로운 제본 도구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서요. 영수증을 그냥 버리기만 하다가 단어 공부도 할 겸, 직접 만든 노트에 영수증을 필사했죠.
그러다 문득, 재미있는 숫자를 발견했습니다. "96/2024" 날짜가 있어야 하는 곳에 날짜 대신 쓰여 있는 분수. 벌써 2024년 중에 100일째가 된 것이 아니겠어요. 저걸 보고 4월의 편지는 100일째가 되는 9일에 보내야지, 생각했습니다.
구독자님, 벌써 2024년이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편지 활용법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인쇄해서 붙이거나 따라 그리세요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해보세요
제가 특히 인상깊게 읽거나 생각해보고 싶은 구절에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노래를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여러분의 재생목록에 추가하세요
정해진 날, 함께 써요
음악 | 봄의 노래
날이 풀리고 공원에 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괜찮은 벤치를 찾을 때까지 걷습니다. 보이는 모든 걸 잘 보려고 노력합니다. 신이 나서 웅덩이에 뛰어드려다 멈칫, 주인 있는 곳을 뒤돌아보는 멍멍이. 어떤 위풍당당한 멍멍이가 물고 가다 떨어트렸을 길 한가운데의 긴 나무막대기. 누가 봐도 새로 돋아나 파릇파릇한 푸른색을 한 새순. 호수에 모터보트를 들고 나와 운전하는 할아버지.
봄은 어쩜 이름도 봄일까요. 따듯한 바람,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연녹색의 코트를 입어가는 나무들. 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봄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딘가 봄을 꿍쳐두었다가 너무 더운 여름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다시 소중히 꺼내어 보고 싶습니다.
제본 | 작두와 단두대와 빵야빵야
정신을 차려보니 여러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시작이 어렵지, 시작하고 제본의 논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니 제가 시간을 들인 만큼, 책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마구 넣은 결과물입니다. 시간과 돈과 종이를 넣어 뽑기를 돌리면 [책]이 나오는, 결과물을 받기까지 최소 4시간이 걸리는 뽑기입니다.
다만,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지라 제본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저는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행복한 껍데기요. 행복한 껍데기가 여러분께 제본 삼총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본 삼총사
제본의 언어는 당연하게도 일상어와 조금 다릅니다. 각자 이름이 있지만 제가 잘못 부르고 있는 삼총사가 있습니다. 작두와 단두대와 빵야빵야. 입에 붙어버리니 고칠 수가 없더군요. 작두는 Cisaille라고 부르는 친구로 하드보드를 자르거나 종이를 자르는 기계입니다. 종이 크기를 계속해서 수정해 줘야 하므로 작두의 날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 수 밖에 없는 무서운 친구죠.
단두대는 이미 제본한 종이 블록이나 책을 자르는 보다 절삭력이 높은 친구입니다. 그렇지만 머리를 들이밀 일은 없어서 사실 작두보다 덜 무서웠는데, 이번에 잘못 제본한 친구 하나를 자를 일이 있어 단두대가 얼마나 무서운 친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작났어요. 단두대의 원래 이름은 Guillotine입니다.
빵야빵야는 셋 중에는 제일 귀여운 필통에도 들어가는 작은 친구로, 셋 중 제가 유일하게 소유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작은 크기에 비해 4만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제 가슴에 구멍을 내어 빵야가 되었습니다. Equerre à talon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저에게는 영원히 빵야빵야에요.
* 아래의 3개 도구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 이미지검색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제가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월에는 페퍼톤스의 노래가 빠질 수 없죠. 이맘때쯤 반복해서 듣는 두 곡의 한국어 노래로 재생목록을 열었습니다. Travis의 명곡도 어쿠스틱 버전으로 들으면 더 봄날 같아요.
재생목록에 들어있는 노래들의 가사를 이어 내려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짝이는 이 사월의 거리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이 느낌
창문의 꽃을 봐요, 사랑스러운 하루 아닌가요?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괜찮을 거예요
당신이 오직 필요한 건 아주 작은 사랑
( ♩ ♪ ♫ ♬ 오리들을 위한 날씨 ♪ ♩ ♪ ♬ )
우비를 입고 수영하는 심해 다이버처럼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과 같지 않아요
나이를 먹고 시간을 잃고, 우리의 이 삶이 당신이 꿈꾸던 것인가요?
삶이 그대로이고, 당신의 영혼이 혼란스러울 때
내가 당신의 편에 있을게요.
아름다운 풍경은 그것대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들도 그대로 둘 사이의 간극이 잔인한 4월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All you need의 노래가사처럼 기억하세요. 세 발자국 앞으로 가고, 여섯 발걸음 뒤로 오게 되더라도. 문은 계속 열려있다는 것을요.
책 |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터 한트케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서점에 그의 번역본이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 함께 공부했던 이가 말했습니다. '이 작가는 미쳤다. 모더니즘 작가들은 페터 한트케에 비하면 사람이다. 읽는 이마저 비탄으로 돌아버리게 만드는 책이다.' 그 당시, 이미 회사 일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던 저는 단호히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벨기에에서 그의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타지에서 생활을 하면 한글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무엇이든 반갑게 됩니다. 미친 작가의 미친 이야기도 한글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했죠.
그가 왜 미친 작가 취급을 받는지 조금은 알겠더군요. 주제라고는 없어 보이는 의식의 나열, 허구와 실재를 넘나들며 중첩되는 이야기와 인물.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에서 보았던 모더니즘의 [의식의 흐름]이 한층 정신병적으로 강화된 듯한 양상.
그렇지만,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랬듯, 페터 한트케도 타자 이해에 목마른 한 개인입니다. 소설의 제목이 말해주듯 소설 전체가 타자에게 쓰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입니다.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긴 이별을 향한 여정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한트케의 글을 통해 만나보세요.
따라갈 수 없는 의식은 그냥 떠나보내면 됩니다. 한트케라는 작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만나나요? 어디서 화해하나요? 결말에서인가요? 그에 대한 대답도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한트케의 글 속에서 그와 제가 만난 대목입니다. 여러분의 만남도 이야기 속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작가를 만나죠. 작가가 화자의 탈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 화자는 작가와 독립해 존재합니다. 작가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기도 하죠. 그 인물이 겪는 상황, 하는 말,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타자를 만납니다.
그렇지만 그 마주하는 지점의 맞은편에는 반드시 독자인 내가 있습니다. 타자의 모습을 한, 혹은 타자가 끌어낸 나라는 자아가 있죠. 생소하기도 하고, 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합니다. 오래전 공부하던 시절 쓴 글이 있습니다. 모더니즘 작가들의 타자에 대한 시선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 더 궁금하시다면 읽어주세요.
화요일, 아틀리에에서 제본하다 돌아와 보니 환히 켜진 화장실이 저를 맞이해주었습니다. 전기세 걱정에 아찔해져 내가 끄는 걸 까먹었나보다 하고 황급히 전원 스위치를 내렸는데 스위치가 고장이 났더군요. 집주인은 28일까지 해외에 나가 있고, 그가 돌아와야 고칠 수 있다고 집주인의 어머니가 램프를 가져오셨습니다. 화장실 안에 콘센트도 없어서 거실에 커다란 연결 호스를 두어 화장실로 연결했습니다.
한 달 동안 화장실 문을 닫지 못한다는 현실보다 현대 미술관에 있을 법한 화장실을 갖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일상의 예측 불가능성은 때로는 예술이 되기도 합니다.
문구 | 허리가 무너진 노트
제가 만든 모든 제본 노트는 저마다의 불행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누구나 작은 불행이 있듯이요. 누구는 표지에 본드가 묻었고, 누구는 너무 많은 속지를 추가하다가 지울 수 없는 접힌 자국이 생겼으며, 누구는 주제에 맞지 않는 두꺼운 실을 써서 모양이 우스꽝스러워졌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건 이 친구들은 자신의 불행을 모르고, 세상에 내놓은 조물주인 저만이 이 책들의 불행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사진 속의 예쁜 파란 노트는 태생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작두 없는 집에서 혼자 잘라보겠답시고 작은 커팅 매트 위에 A1 크기의 종이를 자르다가 수평이 어긋났죠.
부활절 연휴를 맞아 집에서 시간이 넘쳐났기에 풀칠도 미리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뒤틀린 수평을 바로잡기 위해 단두대행에 처했습니다. 책 머리, 책 배, 책 꼬리를 다 잘라버리면 보통은 수평이 맞으니까요.
하나 제가 간과한 건 종이의 두께였습니다. 50g밖에 되지 않는 얇은 종이는 단두대를 버티기에는 허리가 너무 약했고, 결국 무너져내려, 평평해야 하는 책 등이 옆으로 누운 V자 처럼 들어가고 머리에는 뿔이 솟은 괴상한 책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요즘 제 최애입니다.
코트 주머니에 쏙 들어가고, 비쳐서 팔랑거리는 얇은 종이는 샤프나 연필과 궁합이 좋습니다. 이미 형태가 무너졌기에 더 편하게 들고 다니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구에 생긴 작은 불행에 연연하지 마세요. 일기를 쓰다가 오타를 냈나요? 잘못된 곳에 무언가를 붙여 떼어내느라 자국이 남았나요? 표지가 구겨지고 속지에 주름이 잡혔나요?
그 불행이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자, 개성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함께 써요 | 4월의 기록 주제
aie Confiance en Toi, le reste suivra | 당신에게 자신감을 가지세요, 나머지는 따라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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