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 1월, 10년 만에 눈이 온 브뤼셀의 공원에서 찍은 눈사람과 함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종이 쪼가리를 좋아하며 벨기에 사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조각이 담긴 기록을 좋아합니다. 일기와 함께하면 좋을 조각을 모아 편지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본 편지 안의 내용과 이미지는 자유롭게 여러분의 기록에 활용해 주세요.
매달, 새로운 조각으로 만나요. 잘 부탁드립니다.
편지 활용법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다면 인쇄해서 붙이거나 따라 그리세요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해보세요
제가 특히 인상깊게 읽거나 생각해보고 싶은 구절에는 밑줄을 그었습니다
노래를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여러분의 재생목록에 추가하세요
정해진 날, 함께 써요
음악 | 눈을 뜨세요, 용사여
벨기에는 2월부터 해가 조금씩 얼굴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비타민D로 연명하던 10월 이후의 어두운 날이 가고 맑게 갠 날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생동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똑같이 5시라고 해도, 하루 내 1-2시간 높이 뜬 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축복이라는 걸 깨닫게 됐네요.
겨우내 종적을 감추었던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을 기념하여(제 벨기에 친구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실제로는 종교와 연관이 있습니다.) 2월 2일, "Chandeleur"라는 태양 같은 크레프를 굽는 날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동전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크레프 팬을 들고 뒤집기에 성공하면, 그 해는 아주 운이 좋은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들을 노래는 2월의 크레프만 한 태양 같은 노래입니다. Snow Patrol의 "Reworked" 은 기온이 낮아 코끝이 시릴수록 가사가 더 잘 들리는 이상한 앨범이죠. 그중에서 "Open your eyes"는 듣는 이를 겨울잠에서 깨워내는 노래입니다. 눈을 뜨세요! 일어나세요! 움직이세요! 해가 뜨고 있습니다.
편지와 함께 듣기 좋은 열 곡의 재생목록을 보냅니다. 여러분의 기록을 적으실 때 들으셔도 좋습니다. 한껏 웅크렸던 겨울의 나날도, 반대로 우울과 추위에 굳어있던 몸을 깨울 수 있는 에너지도 담았습니다.
책 | 조르주 페렉, <생각하기 / 분류하기>
벨기에에 무겁게 들고 온 책 중,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의 책 세 권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그의 산문집을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어 몇 줄 가져왔습니다.
페렉은 매우 겸손하고 재치 있는 작가입니다. 프랑스 작가가 그러기 쉽지 않죠. 수많은 책을 써낸 작가는 이상과도 같은 이미지를 두고 그가 하는 일은 그저 유예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겸손에서 우리는 그의 철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유예합니다. '무엇이다' 마침표로 단언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쓰는 것으로 답합니다.
<이상 도시를 상상하는 데 있어 존재하는 난관에 대하여> 굉장히 좋은 주제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나는 정말 벨기에에서 살고 싶지 않지만, 간혹 그럴 때도 있다. 나는 정말 한국에서 살고 싶지만, 간혹 아닐 때도 있다. 나는 정말 노바스코샤 섬에 가서 살고 싶었지만 좀 늦었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과 문화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도 같습니다. 여러분의 이상도시를 상상하는 데 있어 존재하는 난관은 무엇인가요?
페렉의 시선은 닿는 모든 것에 있어 촘촘합니다. 그의 읽기에 대한 글을 보면 그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입자로 이뤄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읽기에 대해 생각할 때 [무엇]을 읽는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제 편지를 읽고 계시죠. 그렇지만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 편지를 읽고 계시는가요? 제 편지는 여러분의 공간에 어떻게 펼쳐진 상태인가요? 잘려졌나요? 아니면 연결되어 있나요?
예술 | 비와 기록의 상관관계
마르셀 브로타에스는 벨기에의 예술가입니다. 저는 그의 작품 "La Pluie(비)"를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처음 봤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두 가지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첫째로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끊임없이 내려서 의미를 씻어버리는, 그래서 내용이 생겨날 틈을 주지 않는 외부적인 요인인 비. 또 하나는 그런 비에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브로타에스 자신,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첨예하게 대치되는 듯 보이지만 (비가 남자가 쓰는 행위를 방해)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 내려서 그가 쓰는 단어가 지워지며 그의 시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남기는 무언가는 어느 날은 기록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지만, 또 어느 날은 그냥 휘발되어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라지는 것을 택한 날들도 있죠. 시간이라는 반강제적인 망각은 끊임없이 우리 삶의 기록을 지워내지만, 잉크가 있고 펜이 있고 종이가 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우리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기록된 날과 기록이 되지 않은 날, 쓰인 단어와 검열을 통해 걷어낸 단어, 그 모두가요.
문구 | 마테와 만년필이라는 필사의 조합
만년필도 다이어리 꾸미기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스킹테이프를 활용해 필사를 해봅시다. 밑도 끝도 없이 기울어지는 글씨체에 한 줄기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며, 넓기만 한 종이 바닥을 채워줄 든든한 아군이 돼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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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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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웨코
첫댓글은 놓쳤지만! 좋은 일기거리, 지름(?)거리 제공 감사합니다. 좋은 기록, 좋은 감성 잘 보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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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저널과 너무 행복한 시간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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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mina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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