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가장 위대한 여자 철학자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구독자 님은 뭐라고 대답하실 것 같나요? 추측기로,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독자의 태반일 것입니다. 특히나 특정한 사상(가령, 여성주의 사상)에서 지배적인 사상가가 아닌, 일반 철학자를 대상으로 하자면 말이죠.
왜일까요? 분명 이는 위대한 여자 철학자가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서양 철학의 역사만 생각해 보더라도 많은 훌륭한 철학적 지성이 여성이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죠(이에 관한 책도 있답니다. 나중에 소개해 보도록 하죠!). 다만 아마도, 철학계가 여자들에게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분위기를 갖고 있는 것이 그 중 하나의 이유일 것 같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다른 인문학 분야와 달리 철학은 유독 여학생이 적은 학과이기도 하죠.
철학계에서 여성의 위치란 이렇듯 다른 학제에서들처럼, 또는 그보다도 큰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이를 비관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무언가 긍정적인 변화는 없었을까요? 다행히, 지난 십 년 간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들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지난 5월 29일, Philosophers' Magazine에 게재된 헬렌 비비Helen Beebee의 글이 그것입니다.
비비의 글, "Women in Philosophy: What's Changed?"의 전문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 글이 구독자 님께 철학계에서의, 또한 나아가 각 학제들에서의 여성의 지위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과 희망을 갖는 기회로 다가오길 바라 봅니다😉
(영어로 된 원문은 다음 링크를 통해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philosophersmag.com/essays/242-women-in-philosophy-what-s-changed)
철학계에서의 여자들: 무엇이 바뀌었나?
헬렌 비비가 지난 십 년을 돌아보다.
십 년 전, 제니 솔Jenny Saul과 나는—각각 여자 철학자회(Society for Women in Philosophy, UK) 및 영국 철학회(British Philosophical Association)의 임원으로서—《영국 철학계의 여자들》(Women in Philosophy in the UK)이라는 보고서를 집필했다. 우리가 이 보고서를 쓴 것은, 영국의 철학과들에 대강의 일면식이라도 있는 누구든 대학원생 및 교직원 급의 여자들이 심각하게 과소 대표되어(underrepresented)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데도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상황을 알아차리지도 못했거나, 알아차리기는 했더라도 이를 대처하는 것에는, 내지 말 그대로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보고서에서는 (잘 읽히지는 않는) 통계들이 제시되었다. 철학과들에 대한 대규모의 설문 조사에 기초해 우리가 발견한 것은, 44% 가량의 철학과 학부생들이 여자임에도, 그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석사과정에서는 33%, 박사과정에서는 31%, 종신 강사[역자주: permanent lecturer—우리나라의 부교수 직급 정도에 해당한다]직에서는 26%, 교수직에서는 단지 19%만이 여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놀랄 만한 비율로 여자들이 학계를 떠나는지에 관한 몇몇 가능한 설명으로 암묵적 편견, 고정관념 위협[역자주: stereotype threat—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대상자의 능력이 저해되는 일], 성희롱 등을 들었고, 왜 여자의 참여에의 이러한 장벽이 부당한지를 간략히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이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몇 제안을 내놓았다. 독서 목록, 웹사이트, 학술대회에서의 발제 및 패널 등에서 여자의 대표성을 제고하고, 입시 및 학생 평가에 있어 익명적 절차의 사용을 늘리고, 학술대회에 탁아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것 말이다.
지난 십 년 사이 일어난 한 긍정적인 변화는,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전부 옛날 얘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유의미하게 과소 대표되어 있다는 것은 꽤나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울러 그것이 단지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제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주장이다. 또한 우리의 제안들 중 상당수는 이제 개별적으로 널리 이행되어 있고 학과의 방침들 및 실행들에 널리 자리잡아 있다. (우리는 이 보고서에 이어 2014년 발표된 영국철학회/여철학회 "선행 계획"(Good Practice Scheme)을 내놓았고, 현재 영국의 스물 여덟 학과 및 열 세 곳의 학회가 여기에 가입했다. 이는 학과들로 하여금 어떻게 문제를 대처할지 생각하기 위한 틀과 유인을 동시에 제공하도록 도왔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 또는 적절한 때에 언급하게 될 여타 긍정적 변화들을 촉발했다는 모든 영예를 우리가 누릴 수는 없을 일이다. 또 다른 일로, 지난 십 년 사이에는 다양성과 포용을 둘러싼 문제들에의 상당한 관심에서의 지대한 증가가 광범위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매체들로부터, 대학들로부터, 정부로부터 등으로 말이다. 그 중 일부를 꼽아 보자. 2017년, 미투 운동(#MeToo movement)은 매체들과 운동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학생들 및 학생회들은 학내 성희롱 및 성폭력에 관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매체들은 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을 차별과 괴롭힘의 희생자로 만드는 수많은 다양한 방식들이 로라 베이츠Laura Bates의 《일상 속 성차별》(Everyday Sexism) 프로젝트 및 그의 《일상 속의 성차별》(Everyday Sexism)과 캐럴라인 크리아도-페레스Caroline Criado Perez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Invisible Women)과 같은 책들을 통해 널리 제기되었다. 2017년, [영국] 정부는 250 명 이상을 고용한 고용주들에게 매년 성별 간 급여 격차를 보고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BlackLivesMatter나 전국 학생 연합(National Union of Students)의 《교육을 탈식민화하라》(Decolonise Education)와 같은 캠페인 및 운동을 통해, 또한 학내의 일들을 보도하는 광범위한 매체들을 통해 영국 사회에, 특히나 대학가에 만연한 인종차별에는 한 줄기 빛이 비쳤다. 2014년에는 동성 결혼이 도입되었다. 등등.
이 모든 일들의 결과는, 이것이 단지 나쁜 여론을 잠재우려는 내지 더 많은 명망을 위한 노력에 불과하든 어떻든, 대학들이 평등·다양성·포용을 보다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학생 및 교직원에 대한 성인지 교육(unconscious bias, consent and bystander training)은 이제는 생소하기는 커녕 널리 퍼져 있다. 2016년, 영국 대학 협회(Universities UK)는 일련의 권고 사항들과 더불어, 여자를 향한 학내 폭력 및 괴롭힘, 혐오범죄에 관한 보고서인 《문화 바꾸기》(Changing the Culture)를 만들었다. 평등·다양성·포용에 대한 책임감을 갖춘 선임 교원(senior academic)들이, 때로는 부총장 직급에서, 대학 수뇌부에 포함되는 경우는 부쩍 늘어났다. 대학에 종사하는 과학, 기술, 공학, 의약학 분야의 여자들에 대한 과소 대표성에 대처하기 위해 2005년 도입된 Advance HE의 《아테나 스완 계획》(Athena SWAN scheme)은 2015년에는 모든 학제를 포괄하기로 발표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몇몇 대학들은 성별 간 급여 격차를 줄이기 위한 극적인 단계를 밟고 있는데, 예컨대 2016년 에섹스 대학교는 단순히 여성 교수들에 대한 일괄적 급여 인상을 취함을 통해 남녀 교수 간의 급여 격차를 없애버렸다. 어려운 문제로 여겨지던 것들 중 몇몇은 사실 해결하기 쉬운 것임이 드러났다. 단지 그 쉬운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지난 십 년에 비추어 평등과 다양성에 있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나아졌다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단지 긍정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다시 철학계, 그리고 여자들, 이라는 특정한 주제에로 돌아가 보자. 물론 많은 면에서—결국 철학자들이란 사람들일 뿐이며, 철학과 학생들은 단지 학생이고, 철학과란 단지 학과이다—철학에서의 성평등에 대한 방해물이란 보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사회가, 그리고 특히나 대학이 대면하는 것과 꽤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함 직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예컨대, 성희롱은 그것이 다른 남성 지배적 학제에서보다는 철학과에서 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범-기관적(institution-wide) 접근이란, 그것이 일반적으로 먹히기만 한다면, 철학계에 대해서도 잘 먹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어떠한 문제가 철학계의 독특한 문제가 아닌 경우이더라도, 그 문제를 전부 윗집에다 처리하라고(them upstairs to sort out) 떠맡겨 버릴 수 있음이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의 학생 중 하나가 당신 학회에서 참가자에 의해 성희롱을 당했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신 혹은 당신의 학과가 취할 단계들이 있는가? 또,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인데, 당신은 그 학생이 이를 신고하고, 그와 더불이 이 일이 적절히 처리될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엇을 했었는가?
그럼에도 많은 측면에서 철학계는, 보다 여자들이 잘 대표되고 있는, 언어학이나 역사학, 심리학계에서보다 여자들이 더 과소 대표되게끔 하는 일군의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가령 수학이나 공학계에서보다 철학계에서 더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나, 왜 철학계에 이러한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어쩌면 타 학제에서의 이유와는 다를지도 모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 해결책 또한 다를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행히도 지난 십 년 간 바뀐 또다른 점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단지 관심의 폭발적 증대뿐 아니라, 학술지 편집자와 심사위원 및 학술서 발행인들이 이에 관한 연구를 발행하려는 의지의 극적 전환 또한 이루어졌다. 예컨대, 철학과 학부생에 관한 대규모의 경험적 연구(슬프게도 내가 알기로는 영국에서의 연구는 없었지만) 및 그 결과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져, 왜 철학 개론 과목을 수강하는 미국과 호주의 여학생들이 마찬가지인 남학생들보다 (미국에서는) 철학을 전공하여 공부하려는 경우가, 또는 (호주에서는) 우수 학생 자격을 얻는 경우가(at Honours level) 적은지를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은 명확한 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조만간에 이루어질 일이며, 어느 영역이 보다 검토되어야 할지, 그리고 현존하는 연구들로부터 어떻게 이를 위한 설문을 설계하고 진행할 수 있을지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있다. 또한 진행되어 온 연구로는, 예컨대 철학계에서의 인용 비율이나(가령, 남자의 저작은 여자의 저작보다 더 자주 인용되는 경향을 갖는지) 철학 학술지에서의 게재 허가 및 게재율에 관한 것들이 진행되어 왔다. (여자들은 전임 철학 교원 중에서보다 국제적인 일반 철학 학술지로부터 출판된 논문들 속에서 보다 과소 대표된다. 이는 그들이 이러한 학술지에 보다 적게 논문을 제출하기 때문인가, 또는 그 학술지들이 이들의 연구물에 더 많은 게재 불가 처분을 취하기 때문인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이겠는가?)
새라 제인 레슬리Sarah Jane Leslie와 안드레이 심피안Andrei Cimpian, 메레딧 메이어Meredith Meyer, 에드워드 프리들랜드Edward Freedland에 의해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역자주: 링크 참조(클릭)]는 지금까지의 것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구이다. 이들은 그들이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field-specific ability beliefs)이라고 부르는 것, 즉 서로 다른 학제들에서 성공을 위해 "고정되어 있는, 타고 난 재능"이 얼마나 요구되는지에 관한 믿음을 이끌어 내고자 목표하는 설문을 설계했다. 이 설문은 다음에 따라 이를 어림했다. 먼저 (X라는 학제의) 학계 구성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진술들에 있어서 그들이 동의하는 정도를 매기게 한다: "X에서 탑급 학자가 되는 것은 가르침을 통해서는 얻어질 수는 없는 특별한 소질을 요구한다." 및 "당신이 X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해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는 타고난 자질이나 재능이 필요하다." 이어 이 설문의 결과를, 각 학제에 대해, 그 학제에서의 여자 박사과정생 비율과 상관짓는다.
그렇다면 결과 그래프가 어떤 모양일지 한 번 생각해 보라. y축에는 X학계에서의 여자 박사과정생 비율이 (낮을수록 아래쪽에 위치하게끔) 있게 된다. x축에는 X-학자들이 생각하기에 타고난 재능이 X에서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요구되는지, 즉 X학계에서의 X에 관한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의 세기(strength)가 (낮을수록 왼쪽에 위치하게끔) 있게 된다. 이에 따라 각 학제는 그래프 상에 각자의 점을 갖게 된다. 가령, 언어학에 관한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의 세기로는 x값이, y축에는 언어학에서 여자 박사과정생의 퍼센트는 y값이 정해진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서는, 모든 학제들 전반에 있어,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이 얼마나 박사과정생들 중 여자가 잘 대표되어 있는지와 얼마나 상관관계를 갖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직선을 대강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해 보았는가? 좋다. 이제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로, 그 직선은 어떻게 생겼는가? 나는 이 질문을 학부 1학년 학생들에게 해 보았는데, 답을 준 학생들은 이것 하나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직선은 좌상단으로부터 우하단에로 내려온다. 달리 말해, 높은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은 여자에 대한 낮은 대표성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이다: 사람들이 가장 강한 분야 세부적 능력 신념을 (다시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의 학제에 관해) 갖는 것은 어느 학제에서이겠는가? 이 질문에 답을 준 학생들은 얼추 맞는 편이었다. 이들은 다음처럼 답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리학, 수학, 공학, 컴퓨터 과학, 그리고 ... 철학. 비록 이들이 "철학"이라고 말한 것이 단지 철학자에게, 성평등에 관한 발표라는 맥락에서 질문을 받아서,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 질문을 했다고 맞게 눈치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말했듯, 이들의 답은 얼추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결과는 꽤나 놀랍다. 물리학은 작곡과 거의 같은 점수를 받았고, 이는 영문학이나 고전학, 경제학보다 그렇게 높지 않은 점수였다. 수학은 물리학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오른쪽에(그러니까, 더 강한 분야 세부적 신념을 갖는 식으로) 위치해 있다. 그리고, 훨씬 오른쪽으로, 수학이 다른 모든 학제에로부터 떨어진 것보다 더 멀리 위치해 있는 것은 ... 짐작했듯, 철학이다.
세상에. 내가 보기에 이건 정말로 흥미로운 결과이다. 이제 나는, 통계적 상관관계로부터 인과를 추론하는 데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어찌됐든 이를 해버릴 참이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철학을 잘 한다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에 있어 타고난 명석함을 가질 것으로 요구한다는 것을 믿음은—또한 그렇게 믿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음은—그 언저리에 있는 여자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맞다고 가정해 보자. (비록 물론 이로부터 여자의 과소 대표성에 대한 다른 여러 원인들의 존재가 배제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점은 여성 학부생들을 계속해서 공부하도록 장려함에 있어 과소 대표성을 처리하는 다수의 가능한 방식들을 제시한다. 흥미가 생긴다면, 그 방식에 어떤 것이 있을지는 독자의 생각에 맡겨 두겠다.
경험적 연구에 관해서는 충분히 말했다. 무엇이 여자의 과소 대표성에 대한 잠재적 원인인지, 어떻게 그것들을 유용하게 분류할 것인지, 이로부터 시사되는 개선 전략이란 어떤 것인지에 있어서는 수많은 이론적 작업들이 또한 있어 왔다. 어느 정도는, 이 중 몇몇은 안락의자 과학(armchair science)—그러나 내가 생각기로, 나쁘지는 않은 의미에서—이다. 어떠한 경험적 작업이든 그것을 말이 되게 해내려면 검정을 할 가설이–그리고 그것을 검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하는 것이–필요하다. 또한 어느 가설이야말로 검정할 가치가 있을런지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즉슨 필요한 것은 어느 가설이 보다 더, 보다 덜 딱 보기에 그럴듯한지에 관한 어느 정도의 판단이다. (또, 이를 안락의자 위에서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럴듯함에 관한 그 판단은 추측건대 무엇이건 아무 증거에도 기초하지 않은 것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 그리고–이 모든 것의 요점은 진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기에–또한 그 중 어느 가설이, 만일 확증된다면(comfirmed),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내놓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설명적 가설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여자에 대한 차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암묵적 편견(쉽게 말해, 여자와 남자에 관한 무의식적 일반화로, 사람들–여자든 남자든 똑같이–로 하여금 은연중에 남자에게 특별대우, 가령 그들을 채용하거나 그들에게 더 높은 과제 점수를 주는 등을 하게끔 하는 것) 또는 고정관념 위협에 관한 것. (쉽게 말해, 암묵적 편견의 첨단에 놓인 어떠한 인구 집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추가적인 심리적 내지 인지적 짐이 부과될 것을 요구당한다. 예컨대, 당신이 세미나에서 유일한 여자이고,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한다면 모두로 하여금 "봤지? 여자들이란, 이런 건 통 못 한다니까."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잘 해야만 한다는 추가적 압박을 받는 것 같이 말이다.) 다른 이들이 생각기로 우리는 철학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여야지, 단지 우리의 수업, 세미나, 채용 관행 등에 있어서 우리의 처신에 관해서만 그러할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 철학자들은 실제로 이렇게 지난 수십 년간 말해 왔다. 그런데 한 가지 지난 십 년 간 바뀐 것은 여성주의 철학이 그 자체로 상당히 보다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학부 및 석사 과정에서 보다 자주 가르쳐지고 있으며, 주요 일반 철학 학술지에서 보다 자주 등장하고 있는 등 말이다.
철학계에서 지난 십 년 간 바뀐 다른 것은 무엇이겠는가? 꽤나 많다. 여자들은 이제 학부생 독서 목록, 학술 대회 프로그램, 세미나 시리즈 등에서 상당히 잘 등장하고 있다. 철학사에서의 여자들은 앤 콘웨이Anne Conway, 캐서린 코크번Catharine Trotter Cockburn, 매거린 캐번디쉬Margaret Cavendish, 에밀리 뒤 샤뜰레Émilie du Châtelet, 매리 애스텔Mary Astell 등의 여자들에게 헌정된 학술대회, 논문, 책, 편저서들과 더불어 음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이들은 아직은 듣기 쉬운 이름은 아니지만, 아마도 언젠가는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보다 일반적인 평등·다양성·포용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에 따라서, 인종, 젠더, 장애 및 여타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철학을 주제로 한 책, 논문, 학술대회, 워크샵, 학부 과목은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일반적이게 되었다. (이를테면) 칸트를 가르치는 이들은 보다 그의 인종차별적 관점들에 이목을 집중시킨 뒤 이것들이 보편적인 인간 본성 및 윤리에 관한 그의 관점과 어떻게 맞아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단지 이를 언급하지 않고 학생 중 누구도 이러한 것을 하지 않길 바라기보다 말이다. 이렇게 말할 것은 차고 넘친다.
헌데 내가 강조하려는 마지막 한 가지 변화는, 철학 연구 세미나에서의 기류이다. 상대적으로 빈번히 일어나곤 하던 몇몇 일들은 이랬다. 기가 막히게 공격적인 태도로 물어진 질문들. (나는 혈압이 잔뜩 오른,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거짓이라든지 지식이란 여하간 정당화된 참된 지식이 맞다는 발제자의 '선 넘는' 제안에 '모욕감을 느낀' 이들을 보아 왔다. 하고 싶은 말은, 대체 그 발제자가 뭘 잘못했냐는 것이다. 그 사람이 '멍청이'라는 것인가?) 질문을 줄줄이 반복하며 질의응답 시간을 통째로 다 차지해 버리는 사람. (그들의 질문은 질문을 하고 싶은 다른 청중들의 질문들보다 '너무나' 매우 매우 중요해서였을 것이다.) 또는 십 분 전에 끝나기로 한 세미나임에도 불구하고 입 닫을 줄을 몰라서 좌장으로 하여금 뚫어져라 쳐다보게 하는 그런 사람. 나는 내가 발제문을 발표한 세미나들에서–대학원생이던 옛적이 아닌, 교수로서–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완전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듯 느끼며 그 세미나들을 나왔었다. (나는 완전히 멍청이이지 않다. 또 설사 내가 그렇대도,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꽤 명료히 말했어야 한다. 이건 그냥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이런 일들이 지금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압도적으로 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경우, 다른 이들을 퍽 친절히 대한다. 이는 더 나은 상황으로의 가장 분명한 변화이겠다.
물론, 정말 몸값이 높은 질문이란 이런 것이겠다: 내가 말해 온 수많은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철학계에서의 여자들의 과소 대표성에의 실제적 변화를 만들었기는 한가? 음, 제니 솔과 나는 최근 같은 설문을 진행했다. 우리의 (큰) 표본에서, 여자들은 이제 철학과 학부생의 (44%에서 증가한) 48%를, 석사과정생의 (33%에서 증가한) 37%를, 박사과정 입학생의 (31%에서 증가한) 33%를, 종신 강사의 (26%에서 증가한) 32%를, 교수의 (19%에서 증가한) 25%를 차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누수관의 가장 큰 누수는 여전히 학부와 석사과정 사이에서 일어난다. 여전히 이 단계에서 십 일 퍼센트 포인트가 똑같이 떨어진다. 분명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며 또 우리는 이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알아내기 위한 더 많은 작업들이 필요하다.
천지개벽 급의 개선은 아니지만, 이는 분명한 진전이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은 진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낙관을 가지고 있다. 여하간 이는 즉효책이 있을 일은 아니었다. 철학의 지난한 문제들–자유 의지, 외부 세계 회의론, 심신 문제–과는 달리, 내 생각에는 여자의 과소 대표라는 문제는, 또한 마찬가지로 여타 주변부적 집단들의 과소 대표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의 진보를 이루고 있다.
저자 소개
헬렌 비비는 맨체스터 대학교 철학과의 새뮤얼 홀 교수이며 Philosophy: Why it Matters(2019)의 공저자입니다. 비비는 형이상학 및 메타철학을 포함한 주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 또한 저자는 The Oxford Handbook of Causation의 공편집자이며, 인과 이론 및 흄주의 철학에 관한 영향력 있는 뛰어난 다수의 저작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감사의 글: 소중한 글을 번역하여 게재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 주신 헬렌 비비 교수님 및 Philosophers' Magazine 편집진들께 감사드립니다.
Acknowledgment: Special thanks to Professor Helen Beebee and the Philosophers' Magazine Team, for the permission on the translation and posting.
*오역 및 수정 제안은 댓글을 통해 남겨주시면, 확인 후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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