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많은 철학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이 모든 흐름을 쫓아가기엔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 〈오늘의 철학 논문 큐레이션〉입니다. 지난 두 주 사이 오늘의 철학이 공부한 철학 논문들 중 소개할 만한 논문들을 정리해 보내드립니다. 연구원 D가 보내드립니다.
Moral Luck and the Imperfect Duty to Spare Blame (Hartman)
DOI: 10.1007/s10670-024-00907-3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 우리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요. 운과 도덕 사이의 긴장을 파고든 논문 한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로버트 J. 하트만(Robert J. Hartman)의 <도덕적 운과 비난을 자제해야 할 불완전 의무Moral Luck and the Imperfect Duty to Spare Blame>입니다.
상상을 하나 해봅시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각각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한 사람은 운 좋게 무사히 집에 도착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도로로 갑자기 뛰쳐나온 보행자를 쳐서 사고를 냈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두 사람의 행위는 같더라도 그 결과는 운에 의해 다릅니다. 이때, 우리는 흔히 사고를 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운 관점입니다. 운이 나빠 좋지 않은 결과를 낸 사람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많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직관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고 저 상황이 아니었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나쁜 운이 겹쳤다면 나 역시 저 사람과 다를 바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운으로 인한 잘못에 대해서는 비난을 강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느낍니다. 하트만은 이러한 직관을 ‘비난을 자제해야 한다’는 통찰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되는 직관을 동시에 갖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한쪽에서는 "운이 나쁘니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운이 작용했으니 비난을 멈춰야 한다"고 합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 논문의 저자인 하트만은 흥미롭게도 어느 한쪽도 버리지 않고 제 3의 길을 제시하려 합니다. 하트만은 “그 사람은 분명 더 많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난을 거두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트만은 얼핏 모순처럼 들리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칸트의 철학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취약합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한 사람은 그가 받아 마땅한 분노와 비난을 무조건 전부 받아야 한다"는 법칙을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운으로 인해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 역시 자비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의 도움과 자비를 필요로 합니다. 미래의 나 자신이 겪을지 모를 불운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가혹한 비난을 퍼붓는 법칙을 보편적으로 바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운을 인정하여 상대방이 비난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해도, 때로는 그 분노를 거두고 자제를 베풀어야 할 불완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운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적 태도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Infinitely Permissive (Morten Langfeldt Dahlback)
DOI: 10.1007/s10670-024-00910-8
인식론이라는 분야를 공부할 때에 가장 먼저 마주하는 질문은 "무엇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입니다. 그리고 보통 증거가 믿음을 결정한다고 생각이 되곤 하죠. 예를 들어, 창밖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비가 온다"고 믿어야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한 증거가 있는데도 “해가 쨍쨍하다”고 믿는 태도를 보이거나 “비가 온다”고 믿는 것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기대어, 특정한 증거 앞에서 단 하나의 인식적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입장을 유일성 논제라고 부릅시다.
유일성 논제는 매우 상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튼 랭펠트 달백(Morten Langfeldt Dahlback)는 흥미롭게도 유일성 논제에 도전합니다. 그는 증거가 주어졌을 때,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달백은 이러한 일종의 허용주의를 입장을 극한까지 끌고 갑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증거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여럿일 수도 있다는 것을 넘어, 때로는 무한히 많은 믿음이 모두 합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상상해 봅시다. 여기, 우리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가 있습니다. 이 악마는 당신에게 동전을 던질 거라고 말하며 이렇게 제안합니다. “당신이 만약 동전이 앞면이라고 믿으면 내가 마법을 써서 실제로 앞면이 나오게 해주고, 반대로 뒷면이라고 믿으면 뒷면이 나오게 해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앞면이 나올 거야"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다름 아닌 그 믿음 덕분에 실제로 앞면이 나올 것입니다. 반대로 "뒷면이 나올 거야"라고 믿어도, 그 믿음 역시 참이 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한번 던져 봅시다. "내가 믿으면 참이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믿음을 가지는 것은 허용되는가?" 달백은 당연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면을 믿는 것도 합리적이고, 뒷면을 믿는 것도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죠. 하나의 증거 상황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믿음이 모두 허용되는 것이죠. 이러한 가정적인 상황만으로도 유일성 논제는 무너집니다.
달백의 사고 실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죠. "0부터 1 사이의 숫자 중에서, 앞면이 나올 확률이라고 확신하는 정도를 하나 골라보라. 만약 당신이 0.5만큼 확신하면 실제 확률을 50%로 만들어주고, 0.999만큼 확신하면 실제 확률을 99.9%로 만들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어떤 확률을 떠올리든 그러한 믿음은 참이 됩니다. 그리고 0과 1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실수가 존재하므로, 우리는 무한히 많은 경우의 수 중 어떤 확신을 가져도 모두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사고 실험을 통해 객관적 증거와 합리적 믿음 사이에서 우리가 흔히 갖곤 하는 유일성 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때로는 하나의 증거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인 믿음의 범위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Čapek’s Argument for the Reality of Temporal Passage (Peter Kügler)
DOI: 10.1007/s10670-025-00922-y
우리는 시간이 참 빠르다거나 시간이 흘렀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하곤 합니다. 어제가 과거가 되고, 내일이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만큼 확실한 경험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이토록 당연해 보이는 경험이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논문은 페터 퀴글러(Peter Kügler)의 <시간 흐름의 실재성에 대한 차페크의 논증Čapek’s Argument for the Reality of Temporal Passage>입니다. 이 논문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철학적 주장에 맞서서 우리가 겪는 시간 흐름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옹호하는 논변을 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거나 혹은 언어 습관 때문에 생겨난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주는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된 블록처럼 고정되어 있고,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 따위는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입장을 시간에 대한 반실재론(이하 반실재론)이라고 부릅니다. 저자인 퀴글러는 철학자 밀리치 차페크의 논증을 빌려와 반실재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설령 바깥세상의 시간 흐름이 착각이 맞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착각을 하고 있는 그 경험 자체는 흐르고 있지 않은가?” 퀴글러는 이러한 우리가 느끼는 경험의 흐름을 정신적 흐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착각하든 혹은 올바로 경험하든,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내성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의 마음이 동적이라는 것이죠. 만약 우리 정신이 이처럼 흐르고 있다면, 그 정신과 연결된 물리적 실체, 즉 우리의 뇌나 신체는 어떨까요? 정신은 흐르는데 정신의 토대가 되는 물질은 멈춰 있다는 것은, 마치 유령이 기계 속에 들어있다는 말처럼 기이한 이원론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원론을 피하고자 한다면, 정신의 흐름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흐름이 따라 나옵니다. 퀴글러는 이것이 물리적 시간 흐름을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철학자가 "시간이 멈춘 정적인 우주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시간이 흐른다고 느낄 것"이라고 가정하며 시간의 실재성을 부정해 왔습니다. 하지만 퀴글러는 이 논문을 통해 그러한 가정 자체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정신적 흐름이 없는 정적인 우주에서의 경험은 결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생생한 경험과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은 시간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거창한 물리학 이론을 끌어오는 대신 우리의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의 실재성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작은 마음속 흐름이 거대한 우주의 시간 흐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는 논문, 퀴글러의 <시간 흐름의 실재성에 대한 차페크의 논증Čapek’s Argument for the Reality of Temporal Passage>입니다.
Take a Stand, You Don’t Have to Make a Difference (Huzeyfe Demirtas)
DOI: 10.1007/s10670-025-00926-8
세상의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요?
오늘날 우리는 기후 위기, 빈곤,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텀블러를 쓴다고 지구 온난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 한 사람이 투표한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많은 경우에 나 하나만의 행동이 결과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곤 합니다. 윤리학에서는 이를 무영향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소개할 논문 <입장을 표명하라, 차이를 만들 필요가 없다(Take a Stand, You Don’t Have to Make a Difference)>는 바로 이러한 무영향의 문제에 대한 후제이페 데미르타스(Huzeyfe Demirtas)의 철학적 응답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행동이 미약하게나마 결과에 영향을 줄 것이라거나 모두가 행동하는데 나 하나가 행동을 안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의무를 강조하면서 행동할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우리에게 행동할 것을 명하면서도 조금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결과가 바뀌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동 그 자체가 충분한 도덕적 이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데미르타스는 법정을 떠올려보라고 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피고인이 있고, 배심원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이 항의해 봤자 판결은 바뀌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침묵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미르타스는 비록 결과는 바뀌지 않더라도, 불의에 맞서 입장을 표명하는 행위 그 자체는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투표소로 향하고, 공정 무역 커피를 고르고, 일회용품을 줄이는 행동들은 비록 통계 수치에 아주 미미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행동들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 주장입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도 옳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논문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The fine-tuning argument against the multiverse (Kenneth Boyce & Philip Swenson)
DOI: 10.1093/pq/pqae068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이 거대한 우주 속에 내가 존재하게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지구와 태양계는 어떻게 현실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요? 물리학자들은 이것이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기본 상수들이 아주 조금만 달랐어도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지구, 더 나아가 태양계는 탄생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렇게 상수들이 현재와 같이 아주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개할 케네스 보이스와 필립 스웬슨의 논문 <다중우주에 반대하는 미세 조정 논증(The fine-tuning argument against the multiverse)>은 바로 이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둘러싼 철학적 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다중우주를 통해 우리를 있게 해준 우주 상수의 미세 조정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주가 무수히 많다면, 그중 하나쯤은 우연히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운 좋은 우주에 사는 것뿐이라는 것이죠. 마치 로또를 수십억 장 사면 1등 당첨자가 반드시 나오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세 조정을 기적과 같은 일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논증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보이스와 스웬슨은 다중우주 가설이 역 도박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주사위를 굴려 6이 나왔다고 해서, 과거에 주사위를 여러 번 던졌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우주가 생명 친화적이라고 해서 우주가 여러 개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한편, 보이스와 스웬슨은 여기서 더 나아가 미세 조정이 오히려 다중우주가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신이나 어떤 목적론적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만약 신이 우주를 딱 하나만 만든다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 유일한 우주를 정교하게 조율해야만 합니다. 즉, 우주가 단일하다면 미세 조정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반면 신이 수많은 우주를 만든다면 그 수많은 우주에 생명을 만들 기회가 널려 있으니, 굳이 우리 우주가 생명 친화적이게 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확률적으로 볼 때, 우리 우주가 이토록 정교하게 조정된 우주 상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다중우주보다는 단일 우주일 때 더 설명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논문은 무수한 가능성으로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우주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우즈는 수많은 우주들 중 우연히 성공한 우주가 아닌 유일하게 성공한 우주라는 것이지요. 때로는 철학적 논증이, 우리 자신의 특별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논문이 그러한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What is creativity? (Lindsay Brainard)
DOI: 10.1093/pq/pqae075
우리는 보통 창의성을 천재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또는 세상을 뒤바꿀 엄청난 발명품을 만들어야만 창의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린지 브레이너드의 논문 <창의성이란 무엇인가?(What is creativity?)>는 창의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창의성이 타고난 성향이라고 하고, 다른 철학자들은 결과물의 독창성이야말로 창의성이라고 합니다. 또한 창의성이 꼭 좋은 가치를 창출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리곤 합니다. 범죄자가 기상천외한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도(혹은 그 사람이)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창의성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많은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브레이너드는 창의성의 본질에 대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창의성은 결과물도, 개인의 성격도 아닌, 바로 ‘과정’ 그 자체라고요. 그리고 창의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러한 과정은 일종의 '성공적인 탐험'이라고요.
브레이너드는 단 하나의 틱톡 영상을 만든 십 대 소년 테드의 예시를 들어, 평소에 창의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로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이때 창의적인 것은 테드 개인이 아니라 테드가 영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입니다. 예술가의 그림과 우연히 엎질러진 페인트 자국이 똑같아 보이더라도 다른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그 형상을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 예술가의 의도적인 탐험이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브레이너드는 더 나아가 창의성이 꼭 도덕적이거나 실용적인 가치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엉뚱한 상상을 하거나 심지어 나쁜 짓을 꾸미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곤 합니다. 브레이너드는 바로 이와 같은 인식적 가치야 말로 창의성과 관련된 가치라고 말합니다. 마치 낯선 곳을 탐험하며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지도를 그려나가듯 창의적인 과정은 우리 내면에 지식과 이해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결과물을 내놓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 당신이 겪은 낯선 시도들과 그 작은 탐험의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창의적인 순간들입니다. 브레이너드의 <창의성이란 무엇인가?(What is creativity?)>입니다.
Non-literal lies are not exculpatory (Hüseyin Güngör)
DOI: 10.1093/pq/pqae078
거짓말,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거짓말들을 접합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기도 하죠. 때로는 엄밀하게는 거짓이 아니지만 우리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끔 하는 말도 듣곤 합니다. 언어철학에서 거짓말과 단순히 오해를 유도하는 행위(오도)의 구분은 오랜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 논쟁의 최전선에 있는 논문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휘세인 귄괴르의 <문자 그대로가 아닌 거짓말은 면책되지 않는다 (Non-literal lies are not exculpatory)>입니다.
이 논문은 재미있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은유나 반어법으로 상대를 혼란시킨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거짓말일까요? 누군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 비꼬는 투로 "넌 내 커피에 들어간 크림 같은 존재야"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 사람은 속으로 '너는 내 인생의 오점이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때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한 걸까요? 직관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속마음과 뱉은 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꽤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사람은 물리적으로 '크림'이 될 수 없으니 문자 그대로 이미 거짓이고, 그 사람은 그 문자 그대로의 뜻을 주장하려던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거짓이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존 철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 싸우고 있습니다. 한쪽은 발화된 내용 그 자체를 중시하여, 비유적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주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거짓말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떤 점에서 그러한 문장이 직관적으로 거짓이라고 여겨지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쪽은 화자가 개입하는 바가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이들에 따르면 화자가 생각하는 바와 비유적 문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적 거짓말을 거짓말로 규정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언어적 과정을 통해 그 의미가 전달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귄괴르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적 면책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쉽게 말해, 비유를 사용할 때 문자 그대로의 말도 안 되는 의미(사람이 크림이라는 것)는 대화 맥락에서 면책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자가 의도한 진짜 의미(너를 좋아한다)가 주장으로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즉, 비유적 표현에서 주장된 내용은 겉으로 드러난 문장이 아니라, 이 면책 과정을 거쳐 정제된 의도된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넌 나의 크림이야"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너를 좋아한다"라는 명제를 주장한 것과 다름 없으므로 그 사람은 속마음과 다른 내용을 갖는 명백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논문이 매력적인 이유는 비유적 거짓말을 설명해 내는 데서 나아가 거짓말과 단순 오도를 구분하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대화적 면책을 통해 주장이 되지만, 오해를 유도하는 말들은 여전히 주장이 아닌 잉여적인 함의의 영역에 놓입니다. 이로 인해 일상 언어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비유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거짓말쟁이를 거짓말쟁이라 부를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논문은 이렇듯 언어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언어를 분석하는 새로운 도구를 마련해줍니다.
The Dispositional Account of Emotional Expression (Rebecca Rowson)
DOI: 10.1093/pq/pqae063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참 감정 표현들이 다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보며 환하게 웃는 미소에서는 기쁨을, 찌푸린 미간에서는 걱정을 읽어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도대체 왜 미소가 기쁨의 표현이라고 생각할까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미소 짓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짜 기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그 표정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보이기 때문일까요? 레베카 로슨은 논문 <감정 표현에 대한 성향적 설명 (The Dispositional Account of Emotional Expression)>을 통해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감정 표현의 본질을 두고 가장 대표적이고 주류인 철학적 입장은 제1성질 해명이라고 불리는 견해입니다. 제 1성질 해명에 따르면, 어떤 행동이 감정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위자의 내면에 실제 감정이 존재해야 합니다. 속으로 화가 나지 않았다면 겉으로 아무리 화난 척을 해도 그것은 화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표현과 내면의 인과관계입니다.
레베카 로슨은 두 가지 강력한 반례를 들어 제 1 성질 해명에 반대합니다. 먼저 무대 위의 명배우가 절절한 슬픔을 연기한다고 해봅시다. 그 무대를 보는 관객들은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완벽한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만일 배우가 실제로 그 순간에 슬프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제 1 성질 해명에 따르면 이는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내면에 슬픔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직관은 다릅니다. 우리는 분명 그 배우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두번째로 제 1 성질 해명은 비가시성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누군가 화가 날 때마다 남들은 모르게 귀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고 해봅시다. 내면의 화가 원인이 되어 귀를 만졌으니, 기존 이론대로라면 이것은 화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고 화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귀를 만지는 행위는 화의 표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슨은 제 2성질 해명인 성향적 해명을 제시합니다. 로슨은 감정을 색에 비유합니다. 사과가 빨간 이유는 사과 자체에 빨강이라는 실체가 있어서라기보다, 표준적인 조명 아래서 우리 눈에 빨갛게 보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 표현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행동이 슬픔의 표현인 이유는 행위자가 실제로 슬퍼서가 아니라 그 행동이 표준적인 관찰자에게 슬픔으로 보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내면의 감정이 없어도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의 행동이 관객에게 슬픔으로 보일 성향을 갖게 된다면 배우의 행동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귀 만지기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화가 난 행동으로 보일 성향을 갖지 않기 때문에 표현의 범주에서 제외할 수 있습니다.
로슨은 감정 표현의 설명의 핵심을 행위자의 은밀한 내면에서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으로 전환시킵니다. 감정 표현이 꽁꽁 숨겨진 마음 속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감정을 읽으려하는 사람에게, 이 논문은 감정 표현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레베카 로슨의 <감정 표현에 대한 성향적 설명 (The Dispositional Account of Emotional Expression)>입니다.
In defense of a loose speech theory of knowledge (Neil Mehta)
DOI: 10.1007/s11098-025-02427-4
“안다”는 말의 뜻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인식론이 다루는 아주 거대한 질문입니다. 데카르트는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실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악마에게 속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완벽한 보장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내 앞에 손이 있다는 사실조차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에게 속고 있는지 꿈을 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어떤가요? 일상생활에서 내 손이 여기 있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지 않나요? 이와 같이 철학적 엄격함과 일상적인 언어 사용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닐 메타의 2026년 논문 <지식에 대한 느슨한 화법 이론의 옹호 (In defense of a loose speech theory of knowledge)>는 바로 이 간극을 아주 메우려는 철학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업이 9시에 시작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9시 0분 1초에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9시 정각은 아니니까 “수업이 9시에 시작한다”는 말은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수업이 9시에 시작한다”는 말을 다소 느슨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느슨함 때문에 그 문장이 전달하는 정보가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메타는 "안다"라는 말도 이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엄밀히 말해, 절대적 확실성은 대부분의 경우 가질 수 없기에 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대부분 거짓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람들은 느슨한 화법으로 “안다”는 말을 사용하며, 이를 통해 "나는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이 담고 있는 정보가 참이라는 것입니다.
메타의 이러한 느슨한 화법 이론은 일상적인 수많은 지식 주장을 거짓말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지식이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메타는 이 이론을 통해 "에메랄드를 몇 개나 봐야 초록색인 줄 알게 되는가?"와 같은 까다로운 귀납적 지식의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철학적 엄밀함을 지키면서도 상식을 구제하려는 메타의 시도는 언어를 분석하는 철학자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Do expected utility maximizers have commitment issues? (Paul de Font-Reaulx)
DOI: 10.1111/phpr.70064
우리는 매일 많은 다짐을 하곤 하죠. "내일은 기필코 일찍 일어나서 공부해야지." "저녁에는 딱 한 시간만 놀다가 집에 와야지."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어떤가요? 과거의 결심은 쉽사리 무너지곤 합니다. 일상적인 이러한 상황은, 합리적 선택을 다루는 분야에서 아주 심각한 철학적 문제로 여겨지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바꾸곤 하는 인간이 과연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폴 드 폰트-롤의 논문 <기대 효용 극대화자는 개입의 문제를 겪는가? (Do expected utility maximizers have commitment issues?)>은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인간의 합리성을 구제하려는 시도입니다.
기존의 기대 효용 이론에 따르면, 합리적인 인간은 미래의 자신이 유혹에 넘어갈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녁에 놀기 시작하면 밤새 놀게 될 것을 뻔히 아는 아침의 나는, 아예 파티에 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히는 선택을 해야만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 때문에 저녁에 적당히 놀고 오는 최선의 계획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되는 역설, 이것이 바로 개입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까요? 저자는 아주 대담하게도 개입의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논문은 우리가 타인의 평판을 신경 쓰듯, 미래의 나 자신에 대한 평판도 관리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약 오늘 밤의 당신이 유혹에 굴복해 계획을 깬다면, 그것은 단순히 오늘 하루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당신에게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남기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내일의 나도, 모레의 나도 합리적이고 건전한 계획을 세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만일 오늘의 내가 신뢰를 깨버린다면, 미래의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계획 세우기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저자는 수학적 증명을 통해서 미래가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나 자신과의 신뢰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장의 쾌락보다 미래의 나에게 기회를 남겨두는 것이 훨씬 더 큰 이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합리적인 인간은 억지로 자신을 묶지 않아도, 미래의 기회를 위해 스스로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 계획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유혹을 이겨내는 힘은 의지력이 아니라, 어쩌면 미래의 나를 위한 '평판 관리'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Rigidity, general terms, and real essences (Kenichi Fukui)
DOI: 10.1007/s11229-025-05393-w
철학자 솔 크립키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유명사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고정 지시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이나 '호랑이' 같은 자연종 용어들도 고정 지시어와 비슷하게 작동한다고 주장했지요.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철학적 난관이 발생합니다. 고정 지시어는 본래 단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단칭 용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를 수많은 개체에 적용되는 일반 용어(술어)에 어떻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논문 <고정성, 일반 용어, 그리고 실재적 본질 (Rigidity, general terms, and real essences)>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케니치 후쿠이의 대답입니다.
기존의 많은 철학자들은 일반 용어의 고정성(rigidity)을 설명하려고 그 용어가 추상적인 보편자를 지시한다고 보거나, 용어의 적용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퍼트남의 통찰을 바탕으로 R-고정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합니다. '물'이라는 단어가 고정 지시어인 이유는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이론적으로 규명된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대상들, 즉 실재적 본질을 공유하는 대상들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 현실 세계의 물(H2O)을 가리키며 "이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가진 것만을 물이라고 부르자"라고 약속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정의는 많은 언어 철학적 난제들을 해결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고유명사의 고정성을 자연스럽게 확장하여 설명할 수 있고, 둘째, '물' 같은 자연종 용어는 고정 지시어로 분류하되 '총각' 같은 인위적인 용어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각'은 사회적 정의일 뿐 숨겨진 과학적 본질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셋째, "물은 H2O다"와 같은 과학적 발견이 왜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진리인지도 설명해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논문은 언어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와 본질을 포착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언어철학과 형이상학의 연결을 맛보고 싶다면, 이 논문으로 시작해보는 것 어떨까요?
The radical enactive account of memory errors (Liyu Zhang & Karim Zahidi)
DOI: 10.1007/s11229-026-05439-7
가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돌이켜보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경험, 있으시지 않으신가요? 마치 같은 사건을 두고 친구랑 기억이 다르거나, 겪지도 않은 일을 마치 겪은 것처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죠.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불안전한 '기억’이 무엇인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논문은 리위 장(Liyu Zhang)과 카림 자히디(Karim Zahidi)의 <기억 오류에 대한 급진적 생성주의적 설명 (The radical enactive account of memory errors)>입니다. 기억에 대한 표상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기억은 머릿속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이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파일로 비유되곤 합니다. 과거의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보는 것이라는 입장이죠. 이러한 표상주의적 관점은 직관적이지만 때로는 설명하기 까다로운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앞서 제시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표상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저장된 파일이 손상된 것도 아닌데 왜 엉뚱한 기억이 만들어지는지, 혹은 아예 없던 기억이 머리 속에 있는 현상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논문은 표상주의적 관점에 반대하고 기억이 저장된 정보의 인출이 아닌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기술을 현재 상황에 발휘하는 행위로 봅니다. 바로 기억에 관한 급진적 생성주의입니다.
저자들은 성공적으로 기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과거 경험과 이어져 있다는 연결, 그리고 그 기억이 실제 세계와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는 세계 조건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기반으로 한다면 오류적인 기억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존 이론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가짜 기억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급진적 생성주의는 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잊었던 것을 다시 배울 때 훨씬 빨리 배우게 되는 재학습 현상 역시, 표상주의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을 기억으로 볼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면 생성주의는 조건 충족 여부에 따라 유연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논문은 기억을 박제된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행위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어쩌면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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