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줍레터] Vol. 4 일상의 장면들

2025.04.21 | 조회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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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21.
Vol. 4

'일상의 장면들'

 

 

ESSAY
일상의 장면들

 

  차박차박.

  유독 비가 많이 오는 날. 나는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다. 머리에 빗방울이 닿지 않도록 우산을 든 팔의 각도를 공들여 조정한다. 빗물이 피부와 머리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은 터였다. 약속 시간에 약간 늦을 것 같아 걸음의 속도를 조금 올리기로 한다. 차박대는 소리의 간격이 짧아진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동네 책방에 도착했다. 글쓰기 모임은 오후 730분부터 시작이다. 시계를 보니 딱 맞추어 도착한 듯하다. 일주일마다 보는 얼굴들이 반갑다. 테이블에는 각자 제출한 글들이 가지런히 인쇄되어 놓여 있다. 모임의 방식은 단순하다. 올려진 글들을 돌려가며 차분히 읽고 단상을 적는다. 모든 글이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자기가 쓴 글을 소개하고 질문을 나눈다.

  이날의 주제는 일상의 장면들이었다. 단순한 일상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이야기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아무리 짧은 글이어도 아주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개성이 살아있었다. 단어의 호흡을 느끼며 눈을 천천히 옮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모임에서 나눈 글은 평가가 아닌 감상의 대상이었다.

  글 읽는 시간이 끝나고 감상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각각의 글들을 누가 썼는지 공개하고, 종이에 남긴 코멘트를 읽고 답하는 방식이었다. 읽는 시간 동안은 글쓴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모임의 원칙이다. 누가 썼는지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이날 특히 궁금한 글이 있었다. 비 오는 날 마음껏 바깥을 뛰어다니길 좋아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림님이 손을 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가 쓴 글이에요. 저는 어렸을 적 여름만 되면 감기로 고생하던 기억이 떠올라요. 장마철이 되면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빠져나왔죠. 당연히 우산은 없었고요. 긴 머리가 미역처럼 되는 걸 구경하며 집 앞을 뛰어다니는 게 좋았어요. 한껏 해방감을 누린 뒤에는 어김없이 감기 기운이 따라붙었죠.

  나도 공감을 표하며 기억을 꺼냈다. 저는 초등학교 때 흠뻑 비를 맞으며 산을 탄 적도 있었어요. 사실 계획된 일은 아니었죠. 옛날에 살던 동네에는 한 시간이면 정상에 닿는 산이 하나 있었는데요. 친구네 가족과 함께 주말에 산을 자주 오르곤 했었어요. 어느 날에는 아직 산 중턱밖에 못 왔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바로 내려갈 수도 있었지만 비를 다 맞더라도 정상을 가보고 싶었어요. 설득한 끝에 가장 안전한 길만을 따라 꼭대기 풍경을 보고 왔죠. 분명 그 산을 수십 번은 올랐을 텐데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그날의 장면뿐이에요.

  초등학교 선생님인 윤정 님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꺼낸다. 요즘은 큰일나요. 오염된 비라도 맞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학부모님들께서도 아이들이 절대 젖지 않게 해달라고 각별히 당부하시고요. 우산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씩 꺼낸다. 비 맞는 감성을 모른다는 둥, 낭만이 없다는 둥.

  별생각 없이 웃음 지으며 넘기는 말들이지만, 사실 이런 변화는 지극히 당연해진 것이기도 하다. 20년 전과 지금의 대기 상태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2000년 초반에 비해 대기질은 크게 나빠졌고, 미세먼지와 화학물질의 공기 중 농도는 급격히 증가했다. 오염된 비가 아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점차 자명해졌다. 비에 대한 지금 학부모의 걱정은 과장도 유난도 아니게 되었다.

  대기 오염은 일상을 바꿔놓았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느끼는 어린이의 낭만은 점점 사라졌다. 그 자리는 커다란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 조금이라도 닿을세라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기억으로 대체되었다. 달라진 것은 비에 관한 일상만이 아니다. 기후 변화는 삶의 생애 주기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바꿔놓기도 한다. 적당한 온도의 바람을 느끼며 꽃들을 구경하던 봄의 기억은 점차 짧아져 간다. 답답할 정도로 덥던 여름의 기억과 살을 엘 정도로 추운 겨울의 기억만이 한 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지금의 아기들은 머지않아 한 해를 2개의 계절로 기억하게 될지 모를 노릇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일상이 사라지고 변모할지 두려울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한 뒤면 나는 아주 잠깐 우울해진다. 모임에선 기후 변화에 대한 대화가 짧지 않게 오간다.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는 누군가의 말을 마지막으로 긴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속으로 오래 담아둔 질문을 조심스레 꺼낸다. 이미 경계선을 지나버린 거라면, 우린 어떤 마음으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별말 없이 앉아있던 진언 님이 입을 연다. 특별히 어떤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다가오는 현실을 올바로 마주할 수 있어야겠죠. 지나친 낙관이나 좌절과는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작게라도 한다면 더 좋고요. 나는 진언 님의 명료한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담백한 생각이 나오기 위해 깊고 오랜 고민의 시간이 있었으리라 추측하면서.

  어떤 주제는 너무 거대해서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변화는 조용하게 다가오지만 언젠가 손쓸 새도 없이 모든 일상의 장면들을 뒤흔들 것이다. 그럼에도 해볼 수 있는 것들은 작게나마 있다. 지금의 일상을 기록하고 기억해서, 그 소중함을 되새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물론 변화에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다. 비 오는 날 하늘을 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모임이 끝나고 아직 마르지 않은 우산을 챙겼다. 다행히도 비가 그쳤다. 우리는 차박대는 발소리를 들으며 책방 문을 나섰다. 우산에 가려지지 않은 밤하늘이 눈에 가득 보였다. 사라진 것들과 여전히 남은 것들이 조용히 뒤섞인 밤이었다.

 


CURATION
쓰줍게가 모은 콘텐츠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김영사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김영사

 

근대국가 사회는 권리 위에 세워져 있다. 권리가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권리주체를 확대해 왔다. 어떤 대상에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것을 가치 있는 존재로 보기는 힘들다. 지구법학의 핵심 주제는 이 법 체계를 넓히자는 것이다.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환경을 다룬 책은 많지만, 법에 대한 내용을 함께 깊이 있게 만나볼 수 있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흔히 환경법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법들은 대체로 폐기물 관련 규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실제적인 기후위기 문제와는 거리가 있기도 하죠. <지구를 위한 변론>은 법이라는 시선에서 기후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관점의 이동을 제안합니다.

  '지구법학'이라는 용어는 이 책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는데요. 나무나 강같은 자연에 대해서도 권리를 인정할 수 있다는 관념에서 출발한 단어입니다. 동의 여부를 떠나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었어요. 기후와 법을 동시에 다룰 때 내용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피상적으로 되기 쉬운데, 기대 이상으로 구체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어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난이도가 높은 책도 아니어서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ARCHIVE
쓰줍게가 주운 쓰레기

첨부 이미지

  벚꽃이 지기 전에 밤 산책 겸 쓰줍을 하고 싶었습니다. 꽃이 예쁘게 핀 곳에는 유동 인구가 많아 쓰레기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침 밤 산책 하기 좋은 벚꽃 명소가 있었습니다. 봉투와 장갑을 챙겨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밤 시간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흔적처럼 여러 재활용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먹고 놓고 간 음료 컵이나 병들이 가장 많았지요. 30여 분만에 작은 봉투 2개를 가득 채웠습니다. 가끔은 평소 가지 않던 곳에서 쓰줍을 해보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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