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 있었습니다.
선배와 일하는 스타일이나 성격이 달라 투닥거리곤 했는데 이날은 감정싸움으로 번져 버렸어요. 주로 제가 불만을 말하는 편이고 선배는 아무 말 않고 참는 편이었죠. 갈등의 주 원인 중 하나는 일의 진척도와 실행 부분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을 빠르게 치고 나가는 편이고 선배는 몇 번씩 다시 보고 고치고 다시 고민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저는 해야 할 일이 10개라면 그냥 해버리면 되는 일, 남에게 넘기는 일은 그걸 먼저 해서 일의 가짓수를 줄인 다음 나머지 시간을 시간 걸리고 중요한 일에 집중해요. 선배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것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저는 손이 빠르고 추진력이 좋은 편이었고 선배는 속도가 느린 대신 철학이나 관념적인 부분을 파고 들어 숙고하는 유형이었죠.
보통은 스피디한 쪽이 아닌 사람을 답답해 하고 버럭하지요. 의견을 내는 데에 거침없고 직설적인 저는 강하게 어필하곤 했어요. 둘이 페어로 일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 이날도 같은 문제로 부딪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CEO가 직접 매주 보고 받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둘이 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죠. 저는 중요하고 깊게 고민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일 일인가에 의문을 갖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입사하고 오래되지 않았을 때인데 이 프로젝트를 발의하며 오프잡으로 6개월을 계획하는 걸 보고 '이게 무슨.. 아니 이게 대체 왜 6개월이나 걸린다는 거야?'란 생각이었거든요.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했지만 혼자서도 한 달 반을 집중해 완성했었고 다른 일도 병행했었으니까요. 그런 프로젝트들을 많이 해왔기에 오프잡 3명이 투입되고도 6개월 간 하겠다는 일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심지어 외부 컨설팅 업체를 투입해 같이 하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6개월이 촉박하다고 했어요.
시작부터 불만과 의구심이 가득했는데 외부 컨설팅 업체의 불성실함이나 이해도 부족에 의한 아웃풋 수정이 반복됐죠. 다음날이면 생각이 바뀌어 수정 지시를 하는 선배가 이 혼란을 더 키운단 불만이 컸어요. 커뮤니케이션 로스로 진도가 나가지 않아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간단한 일들에 대한 의사결정마저 밀리며 수습하고 있던 제게 사람들의 불만이 쏟아져 결국 폭발해버렸죠.
"그냥 내가 해버리게 두든가, 결정을 하든가 하세요. 하지도 않을 거 왜 죄다 끌어안고 있는 거에요!"
"뭐가 더 중요한 지 좀 생각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걸 더 고민해야지,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바빠"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결정만 하면 끝나는 건데 중요도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하면 되는 건 쳐내면 되는데 왜 모든 일을 쌓아두고 밀리게 하는 건가요"
"경솔하게 일하지 말고 좀.."
"뭐라구요? 속도가 빠르다고 진지하지 않거나 덜 고민했다고 말하는 건가요? 당신은 납기 개념이 없어요? 퀄리티를 타협하자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방향 못 잡아 계속 번복하면서, 퀄리티도 정해진 시간 내에 수행해야 실력 아닌가요? 아 진짜 일을 왜 이렇게 해. 저 업체도 일을 저렇게 하는데 그냥 계약 취소하고 우리가 하든가. 얼마짜리 컨설팅인데 저런 식으로 일하고, 우리가 일 다하는데 지금 패널티를 걸어도 모자랄 판에 왜 그러고 있는 거에요"
"왜 이렇게 근시안적으로 봐. 다른 게 뭐가 중요해. 당장 빨리빨리 처리하는 거 팀장님이 좋아하고 인정하겠지만.."
"저기요, OO님이야 말로 사장님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 아닌가요? 그래서 다른 건 하나도 안 하잖아요. 본인은 일의 미션이니 가치니 말하며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OO님은 인정욕구가 엄청 큰 사람인 걸 왜 본인만 몰라요? 그리고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요. 입 꾹 다물고 있지 말고. 표정을 숨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말을 안 해. 문제가 있으면 서로 말을 하고 풀게 있음 풀어야 할 거 아니에요. 회피 좀 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 후배가 앉아 있었는데 자리를 피할 타이밍을 놓쳐 나가지도 못하고 가운데 앉아 어쩔 줄 모르던 표정이 생생합니다. 평소엔 불편한 표정을 하면서도 말 없이 참던 선배도 이날만큼은 언성이 높아졌어요. 저와 크게 싸운 날이었죠.
결과는 어쨌냐구요?
6개월로 잡았던 일정은 8개월이 지나고서야 끝났습니다. 계속 같은 이유로 부딪혔구요. 컨설팅 업체는 결국 하는 일 없이 큰 금액을 받아갔죠. 저는 '우리 회사에서 이거 했다고 레퍼런스 쓰지 말 것'을 요청했습니다. 정말 심할 정도로 엉망이었으니까요. 다른 회사에 제안할 때 제게 전화해 레퍼런스 써도 되겠냐 연락이 오곤 했어요. 가장 막내 컨설턴트를 시켜서요. 한 게 뭐있냐,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막내에게 이런 전화 시키는 거 너무 비겁하지 않냐며 그 상사에게 항의까지 했죠. (성질머리가 저 정도였다니..)
전사 과제로 개발 후 실행은 제 몫이었습니다. 선배가 당연하게 제게 넘겼고 나눠서 하다 보니 역시나 진도가 나가질 않았기에 어느 순간 보면 성질 급한 제가 못참고 해치우면서요. 아웃풋도 제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못해 그 긴 기간을 할애했음에도 그 프로젝트에 어떤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채로 말이죠.
그 프로젝트의 공은 선배에게 집중되었고 저와 다른 Task 멤버들은 일 년 가까운 기간에 다른 일을 못하며 현업에서 공백만 생긴셈이 되어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로도 선배와 같이 일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크게 언성을 높인 일이 있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싸우고 오히려 둘의 미묘했던 신경전은 없어지고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었답니다. 크게 싸운 날 이후 선배가 하루는 제게 말하더군요.
"어릴 때 낙서를 했는데 아버지가 칭찬을 했어. 그 다음부터 칭찬받고 싶어서 그림을 열심히 그렸어. 아버지가 좋아하고 어른들이 잘한다는 말을 해주는 게 좋아서. 난 몰랐는데 당신 얘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하니 나는 인정받는 게 중요한 사람 같더라고. 나도 몰랐는데 네 덕에 알게 됐어. 그리고 난 싸우기 싫어서 피하고 그랬는데 너랑 그렇게 싸우면서 감정을 표현하고 처음엔 화가 났는데 후련하기도 했어. 갈등이 있으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맞는 거 같아. 진심으로 고마워. "
네.... 저도 너무 심하게 얘기한 걸 먼저 사과하긴 했어요. 하지만 난 이런 게 정말 싫고 답답해 한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죠. ^^;; 그러곤 또 둘이 웃으며 얘기하고 또 싸우고 또 웃고 했습니다. 후배는 그 장면에 대부분 껴있었구요.
나중에 그 후배가 그러더라구요.
"이 인간들 싸이코 아냐?!" 속으로 계속 욕했다구요. 😂
목요일과 토요일 레터에서는 이때의 제 속마음과 다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했을 것들, 업무상으로는 어떻게 풀었을 지를 짚어 보려 합니다. 금방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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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게
그 옛날 선배들의 조언을 더듬어 보면, "일에 감정을 담으면 무조건 실수한다."며 감정 조절이 필요하다는 말과 "열과 성을 다해 일하면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며 모든 걸 걸어 일하라는 말이 있었어요. 둘 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죠. 게다가 이제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가치관도 고려해야" 하는 환경이고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가장 좋은(빠른, 효율적인, 정확한) 방법을 찾는게 그래서 어려운 일.
프로브톡
그래서 돌고 돌아 저는 이제 관계니 심리니 동기니 하는 것보단(끝이 없더라구요) 일하는 프로세스와 구조, 역할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당연하게 생각하고 일하는 물길을 잘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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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슬기
컬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일하는 걸 선호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회사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니. 제가 희망했던 데로 움직이곤 합니다. 조목조목 서로 논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한 두명 쯤 더 있었음 좋겠습니다. 컬러가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꿈꾸고 옳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하고 싶네요.
프로브톡
다양성을 재정의 해야 하지 않나란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각기 다르지만 관통하는 뭔가는 동질적이어서 커뮤니케이션 코스트와 속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조합이 진정한 코드 인사가 아닌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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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대부분 일을 일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면 그렇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속도는 다르고 일에 대한 열정이나 태도도 다르죠. 근데 그걸 일하고 묶어 봐요. 저도 스피디한 쪽이고 기한내 일이 마무리 되지 않는 걸 못견뎌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가진 일에서의 고민을 같이 고민해 보자고 물어볼거 같아요. 기한내 일의 완수도 중요하지만 결국 퀄리티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고 기한을 맞추려다 일을 망치는 것은 피해야 하고요. 그 고민이 쓸데 없는 것인지 있는 것인지는 당사자에게 들어보고 생각해봐야 알 수 있으니 일단 물어봐야죠. 그 고민이 누구를 위한 고민인건지 살펴보고 그 고민이 향하는 방향에 대한 협의나 합의로 갈등을 풀어나가야 일이 엉뚱한 곳으로 가지도 않고 서로 지킬건 지키며 일하게 될 거 같아요. 근데 막상 들어보는 것 부터가 잘 안되더라고요, 말은 참 쉬운데.
프로브톡
맞아요, 누가 모르나.. 실제론 잘 안 되니 문제지..... 그런 거 같습니다. 요리책에서 간은 적당히,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같은 거. 대체 적당히, 언제 얼마나 뜨겁게는 대체 뭐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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