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의 안과 밖,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카프카의 소설 「굴」에서는 굴을 파고 자신의 공간을 획득하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부정확한 생명체가 등장한다. 허벅지를 덥석 물 ‘추적자의 이빨’을 피하고 먹을 것을 저장해 둘 공간을 점점 넓혀가다가 문득 이리저리 열심히 파놓은 굴 저편에서 나는 작은 동물의 소리 때문에 불안에 시달린다. 어떤 날은 불안에 감겨 굴 밖을 벗어나 자기 굴이 잘 은닉되어 있는지 탐색한다. 안온한 자신의 은신처를 보며 굴을 파는 작업을 계속 하리라 다짐하지만 정작 굴로 다시 들어가려니 자신의 동선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굴을 소유했다는 행복이 나를 버릇없게 했고 굴의 민감함이 나를 예민하게 했으며 굴의 상처가 나 자신의 상처인 것처럼 나는 아프다. 바로 이 점을 나는 예상했어야 했다.”[1]
우리를 둘러싼 지역이나 경계는 그런 것이다. 나를 구분해 주고 감싸는 공간이었다가 숱하게 벗어나고 멀어지게 만드는 영역. 이는 기후위기와 그로 인한 거주에 위협을 받는 인류에게 존재론적인 질문이자 미술의 고유한 주제가 되기도 한다. 비엔날레가 찾아왔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어떤 것을 품어야 할까.
굴 밖에서,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지난달 개막한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타이틀은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이다. 각자가 속한 땅을 떠나거나 소수자가 되는 경험 등으로 누구나 외국인이 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주제일 것이다. 누구나 외국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외국인으로 규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2004년부터 발표한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의 동명의 작품 시리즈에서 가져왔다. 재미있게도 클레어 퐁텐 또한 2000년대 초 이탈리아 내에서 인종차별에 대항한 단체 ‘스트라니에리 오분케(Stranieri Ovunque)’에서 착안헸다. 아드리아노가 2009년 상파울루에서 기획한 전시에 클레어 퐁텐의 작품명을 전시명으로 차용한 전례가 있고, 이 타이틀은 다시 베네치아에서 부활한 셈이니 차용의 차용이라고 해야 할까.
주제를 반영하기 위해 본 비엔날레 큐레이터인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는 이중 언어로 비엔날레의 간판을 구성하였다. ‘Foreigners Everywhere’ 옆에 이탈리아어로 ‘stranieri ovunque’가 나란히 붙어있다. 비교적 낯선 작가들을 불러들여 전시를 기획한 점은 진정한 다원주의 측면에서 인정받아야 하지만 포괄적인 주제에 포용되는 낯선 작품들이 오로지 ‘외국인’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향한다는 것은 아쉬운 측면일 수 있다.[2]
그런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 초상화 섹션에 장우성(1912~2005)과 이쾌대(1913~1965)의 작품이 걸려있다. 우리나라의 근대 미술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소개되는 기억할 만한 순간에 ‘제3세계’라는 구분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3] 서구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즉 소위 개발도상국이라는 범주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남반구(South)’를 다시 보자는 미술계의 흐름을 전유 하였으나 그 안에 한국을 넣어 맥락적으로 이해한 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 모두 상대적이다. 우리 땅을 떠나 주체성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쉽게 ‘제3세계’, ‘외국인’으로 통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지역을 떠나 낯선 것들을 바라보고 생각해야 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이 베네치아에 걸리기 전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지점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굴 안으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수상작은 크초(Kcho)의 <잊어버리기 위하여>(1995)다. 쿠바의 ‘보트 피플’이 남기고 간 뗏목, 타이어, 배를 맥주병이 받치고 있는 작품이다. 난민들의 삶을 상징하는 이 작품은 지난 4월 베네치아에서 광주비엔날레 30주년 특별전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에서의 공식적인 비엔날레와 그 시작을 알리는 첫 수상작이 이주와 난민을 다룬 작품이었다는 것, 그리고 현재에도 유력한 담론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9월에 개막할 제15회 광주비엔날레의 제목 《판소리, 모두의 울림(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과도 연결성이 있다. 《판소리, 모두의 울림》은 인류가 뿌리내린 개인 거주지부터 행성 지구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전시라고 소개한다. 예술 자체가 ‘관계적 공간’을 재사유하는 공간이자 특정 장소라는 것, 그리고 이 공간이 페미니즘, 탈식민지화, 성 소수자 인권 등의 해방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여기서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이나 ‘상황과 장면’을 의미한다.[4] 많은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 선보이는 음악이 판소리이고, 판소리의 구성을 세는 단위도 ‘마당'임을 고려하면 판소리에는 한 공간에서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모여 살던 우리의 마당문화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30주년 특별전 전시 제목 또한 《마당: 우리가 되는 곳(Madang: Where We Become Us》이다. 이렇게 한 공간에 정주하던 우리에게 이주는 낯선 것일테지만 우리는 본디 '이주하는 인류'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학자 샘 밀러(Sam Miller)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이주하는 인류의 후손이다. 메소포타미아 이후에 소수의 사람이 이주를 멈추고 마을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이 정주민의 출현이다.[5] ‘마르투의 혼인’이나 『길가메시 서사시』 등의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산을 떠돌던 야만적인 남성이 도시에 정착하고 문명화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꽤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터전을 떠난 각각의 주인공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혹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이주를 택하고, 이주를 통해 결국 자신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어 큰 인물이 된다는 플롯은 현재에도 너무나 익숙하다. 그럼에도 이주에 더 많은 함의가 덧씌워지기 시작한 데에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에서 제3회 광주비엔날레 《人 + 間 Man +Space》(2000)를 관람하며 만난 니키 리(Nikki S. Lee)와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의 작품 그리고 당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재일의 인권: 송영옥과 조양규, 그리고 그 밖의 재일 작가들》(2000)을 통해 인생의 문턱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되새기던 자신을 떠올린다. 서경식 선생은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인 프란츠 파농(Franz Fanon, 1925~1961)의 통찰, ‘식민주의’가 부여하는 ‘계통적인 부정’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 자신의 삶에 강렬한 계시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식민주의로 인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 질문을 동년배 재일 조선인 작가 문승근(1947~1982)에게는 다르게 묻는다. 왜 더 분출하지 않는가. 후지노 노보루(藤野登)로 일본 미술계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한 뒤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밝힐 용기가 없었던 청년. 고뇌로 괴로워하던 문승근의 작품이 지적이고 단정하며, 아름다우면서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경계에 사는 자신이 재일조선인에 대해 품는 복잡한 감정 때문이라고 밝힌다.[6]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이주를 거듭해 왔지만, 현재의 이주가 다른 레이어를 지니게 된 까닭은 문명국가가 세워지고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다양한 이주를 포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와 배우자, 난민과 은퇴생활자, 방랑자와 주재원, 정복자와 구직자 등’은 이제 국가와 국경을 넘어서 인종과 인종차별주의와 연결된다.[7] 비엔날레의 주제가 이주와 경계, 식민지와 오리엔탈리즘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볼 때 그만큼 이주와 경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고, 그사이 이주와 경계는 다른 방식으로 분화되고 계층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살고 자유롭게 이동한다. 반면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살 수 없고, 떠날 수도 없다. 비엔날레가 각각 구태의연한 담론에 오래도록 매달려 있다고, 혹은 자기복제를 반복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대체로 그러한 비판이 공공연하게 있었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동안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이주와 경계가 사라지기 어려운 이유는 사실 이야기를 꺼낸 지 오래된 것일 뿐 직접적인 실체에는 정확히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립된 것들을 인식하게 하고 분화되어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들을 돌아보며 감각하는 ‘경계’에 비엔날레가 있다.
[1]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전영애(역), 서울: 민음사, 2017, pp. 80-1.
[2] Ben Eastham, 60th Venice Biennale, “Foreigners Everywhere”, e-flux, April 2024, https://www.e-flux.com/criticism/603719/60th-venice-biennale-foreigners-everywhere, (2024. 05.24. 접속).
[3] 문소영, 「베니스부터 광주까지, 비엔날레 이제 달라질 때」, 『중앙일보』, 2024.04.26.,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5259, (2023.05.07. 접속)
[4]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웹사이트 참고.
[5] 샘 밀러, 『이주하는 인류』, 최정숙(역), 서울: 미래의창, 2023, p. 48.
[6]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최재혁(역), 파주: 돌베개, 2023, p. 170.
[7] 샘 밀러 (2023), p. 10.
이희옥 / (재)광주비엔날레 홍보마케팅부 stitch06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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