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사명”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은 2004년 프랑스 오베르빌리에(Aubervilliers)에서 동네 주민들과 알비네 불안정한 미술관(Musée Précaire Albinet)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프랑스의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과 퐁스국립현대미술관(Fonds national d'art contemporain)의 컬렉션을 대여해 말레비치와 몬드리안, 살바도르 달리, 요셉 보이스, 앤디 워홀, 르코르뷔지에 등의 작품을 지역 주민들의 시각과 구성으로 재해석해 전시를 발표했다. 이때 지역 주민들은 직접 두 미술관에 소장품 대여와 관리 등에 대한 교육을 들었고,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을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워크숍과 토론 활동을 거쳤다. 멀끔하고 단정한 화이트큐브가 아니라 낮은 층고의 공간 속 형광등 아래 초록색, 주황색, 하늘색, 빨간색 등의 원색으로 칠한 벽, A4 용지로 만든 전시 벽글이 붙어 말 그대로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허쉬혼이 즐겨 쓰는 매체, 판지나 호일, 덕트 테이프, 잡지, 합판 등은 흔하지만 구하기 쉽고, 비용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한 좌대와 전시 구성은 허쉬혼이 말하는 ‘예술로 인한 변화’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기 가장 적합한 재료였다.
소외지역에 미술관을 들이는 모든 단계를 지역 주민의 품을 들여 완성하고 선보이는 것. 이 모든 과정은 지역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허쉬혼은 이 프로젝트의 “불가능한 사명”을 위해 이웃, 주민, 위치, 프로그램, 방문객, 활동 등을 긍정하고 토론, 논증, 소통, 정당화 및 설명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했다고 술회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끝없이 부딪히는 합의와 동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평을 앞에 두고도 지속적으로 예술 작품의 자율성과 그 영향력을, 또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옹호해야 하는 도전이었다.[1] 허쉬혼의 프로젝트의 가장 큰 화두를 소외 지역에서 예술의 존립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 정부 기관의 논리와 지역 주민의 인식과 겨뤄 프로젝트를 지속했다는 점이 먼저 선다면 하나의 생태환경, 즉 트랜스로컬리티가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지로 구현한 작은 도시
얼마 전 우연히 택배 상자를 모아 만든 작품을 발견하고 재료의 유사성 때문인지 허쉬혼의 작업을 떠올렸다. 아시아의 도시 경관들이 가지는 시각적 공통점에 주목하고자 한 전시[2]에서 아퀼리잔 부부는 자신들이 고향 필리핀을 떠나 호주 브리즈번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느낀 디아스포라에 천착하여 <인-해빗: 또 다른 나라 프로젝트>(2023)를 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 재활용 판지로 상상의 집을 제작하는 워크숍을 열 때마다 각각 다른 형태의 집이 탄생한다. 작품 속 판지는 해외 이주한 필리핀 사람들이 집으로 물건을 보내는 발릭바얀 상자(귀국 상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머물며 살 집과 땅,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각자의 집을 모아 도시가 완성한다.[3] 작품이 전시되는 지역의 구성원들이 모여 고민한 워크숍으로 사람들은 연대하게 된다. 발릭바얀 상자에 큰 의미를 두었다면 로컬리티로 남았을 테지만 참여자들의 협력을 통해 상이한 지역이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이자 트랜스로컬리티를 위한 활동이 된다.
새로운 생태환경, 트랜스로컬리티트랜스 로컬리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그저 경제적 존재로 그치는 야만상태의 단계에서 그 너머로 갈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야만상태에서 잠재된 인간의 드높은 능력이 발전하는 것은 도시에 참여하고 도시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4] 지역이라는 영역과 그 환경이 우리의 능력을 함양해 준다면 우리는 공간을 휘두르는 근대적 권력과 그 유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지역 그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이라고 하면 한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보다 실천적인 방법론으로 트랜스로컬리티가 있다. ‘트랜스(trans)’와 ‘로컬리티(locality)’의 합성어인 트랜스로컬리티는 로컬리티로 부여된 사회적인 경계를 허물어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공간에 통합되고 새로운 생태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주와 기후변화, 경제적인 것은 물론 인구 또한 양극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절되는 것을 잇고, 지속적인 활동과 확장을 꾀하는 움직임이다.
'지역'에 사는 우리를 담을 것
단순히 중앙과 지방으로 보는 구분보다는 자율성과 연대에 입각하는 ‘지역’의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경제적 공간만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곳을 정주하거나 이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환경과 도시, 지역 생태계의 일부인지를 가늠해보고 ‘주체-객체’의 환원주의적 대립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작품에서 트랜스로컬리티의 발생을 주목한 이유는 로컬리티를 인식하는 것, 그 이상의 실천적 관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탈중심적이고 분권적인 질서를 지향하는 동시대적 관점에서 개별적 공간이나 지역에 대한 관점이 증대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5] 그래서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공간과 지역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지역 사회라는 연대의 책무 아래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이고 상호적인 연대를 추구하는 예술적 접근은 물론 트랜스로컬리티가 작동할 수 있도록 다른 이종적 시도가 필요하다. 로컬리티는 우리가 같이 나누고 사유할 수 있는 바탕이고 이 바탕을 다채롭게 만드는 환경적 소산이 트랜스로컬리티임을 인식한다면 “세계적 관점을 지니되 지역 주민으로 살라!”는 카프카의 말처럼 다양한 지역적 맥락에서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1] 토머스 허쉬혼 작가 웹페이지, http://www.thomashirschhorn.com/about-the-musee-precaire-albinet/, (2024.06.26. 접속).
[2]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전 《이음 지음》, 2023. 12. 22. ~ 2024. 7. 21.
[3]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페이지, https://www.acc.go.kr/main/exhibition.do?PID=0202&action=Read&bnkey=EM_0000006926 (2024.06.26. 접속).
[4] 마르쿠스 슈뢰르, 『공간, 장소, 경계 : 공간의 사회학 이론 정립을 위하여』, 정인모, 배정희 (역), 서울: 에코리브르, 2010, p. 258.
[5]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자율과 연대의 로컬리티, 서울: 소명출판, 2016, p. 86.
이희옥 / (재)광주비엔날레 홍보마케팅부 stitch06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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