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 PICK에서는 첫 외부기고 아티클 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고자 임재환 님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UCSD)에서 미술사, 이론, 비평과 실기 박사 프로그램 전공 중이며, 한국과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사회참여 예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구 선봉주의(vanguardist) 문화예술 이론과 형식주의(formalist)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이 중심이 되는 신자유주의 미술계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티클 발행에 앞서 기고자의 인터뷰를 통해 예술이 지닌 사회적 가치에 관한 연구와 실천의 다양성과 깊이에 다가가 보고자 합니다.
이희옥(이하 Q.) 우선 공동편집인으로 활동하시는 사회참여예술 비평 학술지 ‘FIELD’에 대해 소개해 달라.
임재환(이하 A.) 학술지에 대한 정확한 소개를 위해 FIELD 저널 (https://field-journal.com/)의 소개문을 먼저 밝힌다.
우리는 관습적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관계가 질문되고 재조정되는 특별한 문화적 순간에 살고 있다. FIELD 저널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형태에 전념하는 새로운 예술 활동이 놀랍게 확산함에 따라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룬다.…많은 주류 예술 종사자들에게 이 열린 질문이 예술의 유일무이함을 위협하는 신호로 읽힐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예술계 학술지와 출판물에서는 이 질문들에 답하는 작업이 무시되곤 했다…이런 이유로 FIELD저널 편집국은 다양한 예술가, 사학자, 큐레이터, 활동가 그리고 연구자들의 글을 담는다. 학문의 교차로에서 주변의 문화적 변화를 깊게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1]
FIELD 저널 소개문 일부
위의 소개문은 내가 FIELD 저널과 함께하게 된 이유를 기술한다. 타 플랫폼에서는 기관이 주축이 된 사회참여적 예술을 긍정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데, 그 한계는 고민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미술의 위대함을 해치고 위험에 빠뜨린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계는 미술이 다중매체를 사용하고 다학제적이기 때문에 경계를 초월하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미술계가 정한 경계 밖에서 예술을 만들고 논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이런 오랜 관습이 역설적이라 판단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미술계는 이런 게이트 키핑(gate-keeping)이 만연하다.[2]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정녕 예술은 무엇이며 형식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사회정치 변화에 어떻게 일조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Q. 연구자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이기도 한 그랜트 H. 케스터는 「PP PICK 020. ‘공적 영역에서의 예술, 비평이 어려운 이유」에서 잠깐 언급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 일관적 커뮤니티”(politically-coherent community)에 대해 설명해 달라.
A. 곧 PP PICK에 소개될 내 글에도 서술하듯이 케스터(Grant H. Kester)가 정의하는 “정치 일관적 커뮤니티”는 합의를 거쳐 정치적 의견 일치를 이룬 공동체를 의미한다.[3] 예술가가 선봉적 위치에서 어떤 커뮤니티를 ‘위해,’ ‘통해,’ 또는 ‘대신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 부류가 있고 커뮤니티와 예술가가 내부적 논의를 거쳐 문화예술을 통해 행동하는 다른 부류가 존재한다. 케스터가 이 개념을 소개한 것이 1995년 아티클이었으니 벌써 30년이 되었지만 사회참여 예술의 맥락에서 현시점에서도 예술가와 공동체 간 ‘정치적 일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케스터는 Beyond the Sovereign Self (2023)[4]에서 케이프타운 대학교(University of Cape Town, UCT) 교내에 설치된 대영제국령 케이프 식민지의 전 총리 세실 로즈 조각상을 무너뜨리려 한 두 학생 그룹, UCT 학생 단체 Rhodes Must Fall (RMF)과 트랜스젠더 학생 그룹(Trans Collective)을 “정치 일관적 커뮤니티”의 예시로 소개한다. RMF는 흑인을 억압해 온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의 조각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Shackville이라는 판자 ‘조각상’을 설치하고, 시를 읽고 퍼포먼스를 하며 행진하는 등 사회참여적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이들의 활동은 케이프타운 지역 전체의 이슈로 확장된 것은 물론 로즈 조각상의 제거를 현실화했다. 제거 일주년을 맞아 RMF는 UCT 교내 부서와 협업해 공식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에 트렌스젠더 학생 그룹이 전시에 자신들이 RMF와 함께한 연대적 노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RMF는 트랜스젠더 학생들의 비평을 받아들이고 공감하여 전시를 닫았는데, 서로의 정치적 일관성에 합의한 사례이자 한 조직이 사회에서 등한시된 공동체를 문화예술로 묘사하고 대변할 때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포괄할 수 있을지 질문하는 사례이다.
사회참여 예술에 있어 케스터의 “정치 일관적 커뮤니티”와 함께 ‘대화적 예술’ (dialogic art)이 중요하다.[5] 대화적 예술은 예술가의 공동체 협업에 있어 말 그대로 두 그룹 사이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 간(reciprocal) 소통 및 참여를 통해 공동체의 목소리가 예술 작업에 직접 반영되는 과정을 뜻한다. 협치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논의와 협상, 숙의가 필요하듯 예술가는 협업자와 대화의 과정을 통해 예술 작업에 다가서야 비로소 서로가 동의하는 상호성을 이룰 수 있다. 진정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를 바란다면 자신의 미적 자주성을 우선시하는 예술가의 독단적 결정과 그 일방성에 공동체가 배격받는 악순환은 끊어져야 한다.[6]
Q. 사회참여 예술이 ‘현실을 전달하는 다른 방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위 제도권 미술 공간 내에서 보일 때 가려지고 축소되는 커뮤니티가 있음은 알지만, 밖으로만 나갈 수 없는 한계 또한 있다. 균형점은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A. 나 또한 사회참여 예술이 ‘현실을 전달하는 다른 방식’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현재는 사회참여 예술을 연구 중이지만 지난 십여 년간 사회정치적 주제로 활동을 해 온 실기 전공자/작가로서 다양한 ‘전달’ 방식을 경험해 봤기에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다만 이 ‘다른 방식’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고민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1900년대 초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소련의 사회적 혁명을 이루는 데 있어 프롤레타리아는 문화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교육받은 지식인 계층’의 계몽주의적 ‘철학, 역사, 경제 이론을 통해 사회주의를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레닌은 노동 계층과 사회주의 이념을 위한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론가들의 복잡한 언어를 중심으로 리더가 먼저 대중의 지각을 깨우치는 순간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할리우드 영화, 매거진 삽화, 탭 댄스 등을 ‘키치’ (kitsch) 문화로 분류하고 이를 평범하다며 평가절하하는 반면 잭슨 폴록의 형식주의 페인팅은 승격시켰다.[8] 미술 전공자가 아니어도 이해하기 쉬운 ‘키치’ 문화와 달리 그린버그가 옹호하는 폴록의 복잡한 추상표현주의 페인팅은 미술 비평가와 작가만 판독 가능할 수 있는 암호가 가득하다.[9] 비슷하게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예술에 의해 생산되는 이해는 주체인 관객에게 있지 않고 예술 작품 자체의 객관적인 구성에 있어야 하므로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며 그 이해의 순간을 불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10]
또한 미술비평가 할 포스터(Hal Foster)는 예술을 미술계에 예속시켰을 때 발생하는 ‘지연된 행동’ (Nachträglichkeit, deferred action)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계보를 이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11] 요약하자면, 레닌과 그린버그, 아도르노, 포스터는 사회 변화를 위해 이해하기 쉬운 대중문화보단 지식인이 주장하는 복잡한 이론이 더 중요하며 그들이 간택한 예술가들의 작업만이 진정한 예술이라 말한다. 또한 그들이 정의한 계몽주의 기반 예술이 관객에 지각적 영향을 주어 미래에 올지도 모르는 혁명적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희망한다.
주신 질문 중 ‘밖으로만 나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포인트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본 질문은 예술이 꼭 미술계 안에서만 선보여져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미술계가 사회적 억압을 받지 않은 특권층 백인 남성 이론가들 (레닌, 그린버그, 아도르노, 포스터 등)을 비판 없이 수용, 인용해왔고 그것이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 당연한 듯 일반화되었다. 그 때문에 많은 문화예술계 종사자가 미술계만의 특별한 파워를 맹신하게 되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질문에서 언급하신 ‘한계’는 기득권이 정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경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Q.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이를 적용하기 위한 활동 계획이 있다면 알려달라.
A. 본 인터뷰를 통해 연구 중인 내용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사실 이미 197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한국 민중운동, 특히 민중 미술계에서 사회참여 예술에 대해 비슷한 내용들을 다뤘다. 민중 문화운동가들은 벽화, 목판화, 만화 등을 다양한 공동체 교육, 학생 운동, 풀뿌리 노조와 함께 만들며 사회 변화에 직접 일조했고, 성완경 평론가를 비롯한 동시대 한국 민중미술 연구가들의 글과 활동이 한국 사회참여 예술 사례가 된다고 본다. 2022년 타계하신 고(故) 성완경 미술 평론가는 “1980년대 민중미술 시말기” [12]를 통해 민중미술을 ‘비판적 모더니즘’과 ‘민중 문화운동’으로 구분한다.[13]
‘비판적 모더니즘’은 1970-80년대 작가들이 자신의 지각을 중점적으로 반영해 예술품을 만드는 현상이었던 반면 ‘민중 문화운동’은 민중미술이 급진적 사회 혁명의 정치적 의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접근이었다. 민중미술 예술가/이론가 단체인 ‘현실과 발언’을 비롯해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 반대해 광주통일미술제(Anti-Gwangju Biennale)로 맞선 문화 활동가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14] 이런 사회참여 예술의 역사적 배경과 현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현대 한국 미술계에서 형식적 아방가르드를 따르는 사회적 예술/예술가들과 자본주의/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참여 예술/예술가/활동가들의 차이를 연구한다. 복잡한 이론이 아닌 직접적 실천(praxis)이 사회적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도 연구한다. 사람이 몸소 실천함에 따라 상징적 메시지를 발생시키고 결국 사회를 변화시킨다.
한국에도 기존 미술계가 정의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사회에 저항하는 이들이 몸을 이용해 수행 (perform)하는 사례들이 있다. 간디(Mahatma Gandhi)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수행한 실천적 행동들처럼 삼보일배, 촛불 운동, 응원봉 시위, 풍물 공연, 마당극, 퀴어 퍼레이드 행진 등은 사람들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사회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담은 문화 예술적 실천으로 읽힌다.[15]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사회참여 예술에 대해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갖거나 활발한 토의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이유로 PP Pick의 존재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아직 한국 미술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육 기관에서 마저 ‘대화적’ 사회참여 예술에 대한 연구와 활동이 부진하며, 그 때문에 사회참여 예술에 대한 수용 범위가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생각건대 한국 사회에서 사회참여 예술을 논할 때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만 언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리오는 사회 비평을 미술계로 제약하는 ‘소규모 유토피아’(micro-utopia)를 지지하며, 비숍은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갈등과 논쟁을 통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며 ‘적대적인 예술’(antagonist art)을 주장한다.[16] 나는 이들이 사회적 예술을 연구한다고 주장함에도 그들만의 제약적 정의에 따라 대중과 예술가 사이 비(非)상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들의 학문적 접근에 대해 냉소적 의문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참여 예술을 연구, 실천한다면 케스터가 제안하듯 저항 자체에서 미적 독창성을 찾는 ‘대화적 열림’(dialogical openness)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17] 그런 생각을 가진 비식민주의적 연구자, 예술가, 활동가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18]
[1] FIELD | A Journal of Socially-Engaged Art Criticism, https://field-journal.com/about/
[2] 한국에서 예술 고등학교와 미국 예술 대학 학부와 석사 그리고 지금 과정 중인 박사까지, 이런 제약을 끊임없이 다양하게 느껴왔고 다수의 관습적 예술 종사자들에 의해 지금도 경험 중이다. 보통, 이들에게 ‘예술가’는 예술 대학을 졸업한 후 갤러리와 비엔날레, 아트 페어에서 전시하고 작업을 판매하며 레지던시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프로젝트 보조금을 받아 뮤지엄 개인전을 이루는 사람들 뿐이다. 관습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런 정식적 루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아닌 존재로 취급된다.
[3] Grant H. Kester, “Aesthetic Evangelists: Conversion and Empowerment in Contemporary Community Art,” After Image 22, no. 6 (January 1, 1995): 5–11, https://doi.org/10.1525/aft.1995.22.6.5., 6
[4] 본 서적은 2025년 예술대학협회 College Art Association (CAA) Frank Jewett Mather 상을 수상했다. 이 점을 공유하는 이유는 케스터의 사회참여예술 연구를 통해 나름 현대 예술계에서 사회참여예술의 범위와 이해도가 넓어졌음을 시사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케스터가 상을 받은 것만으로 미술계가 항상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사회참여예술을 받아들일지는 고민해볼 지점이다., Grant H. Kester, Beyond the Sovereign Self: Aesthetic Autonomy from the Avant-Garde to Socially Engaged Art (Duke University Press, 2023).
[5] Grant H. Kester, Conversation Pieces: Community and Communication in Modern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6] 작가가 공동체와의 대화를 통해 기관친화적 작업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공동체의 목소리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최소한의 소통도 없이 진행된 작가의 의도가 우선시 되는 작업보다는 상호 소통이 지속되는 작업 과정이 있어야 예술에 의해 공동체가 등한시되는 역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7] V. I. Lenin, What Is to Be Done? (Martino Fine Books, 2013).
[8]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Partisan Review 6, no. 5 (1939): 34–49.
[9] 사회참여적이라 주장하는 수 많은 현대미술 작품들 또한 관객들이 이해/접근하지 못하도록 수수께끼 같은 시각적 요소를 이용해 작가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10] Theodor W. Adorno, Aesthetic Theory, ed. Gretel Adorno and Rolf Tiedemann, trans. Robert Hullot-Kento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11] Hal Foster, "What's Neo about the Neo-Avant-Garde?" October 70 (Fall 1994): 5–32.
[12] 이솔, 『마지막 혁명은 없다:1980년 이후, 그 정치적 상상력의 예술』, 서울: 현실문화연구, 2012 중 성완경 에세이
[13] Wan-kyung Sung, “The Rise and Fall of Minjung Art” in Sohl Lee, ed. Being Political Popular: South Korean Art at the Intersection of Popular Culture and Democracy, 1980-2010 (Hyunsil Publishing, 2013), 189–202
[14] 광주비엔날레 “다큐멘터리 Documentary film│광주비엔날레, 30년의 시선 Gwangju Biennale, 30 Years of Perspective│전체 영상 공개” (2024), https://www.youtube.com/watch?v=TWfqx31Jcvw, 5:00
[15] 이런 실천의 행위가 사회 변화에 있어 항상 완벽하고 부드럽게 이뤄진다는 것은 아니다. 인도 최하층민 달릿 계층에 속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간디가 부유층임에도 하층민을 위하는 척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흑인 혁명가 말콤 엑스는 흑인들이 죽어감에도 마틴 루터 킹이 점잖은 척 ‘비폭력’을 주장한다며 그와 달리 흑인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 사용을 옹호했다.
[16]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Les presses du réel, 2002);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 The MIT Press 110 (Autumn 2004): 51–79
[17] Kester, Conversation Piece; Kester, Beyond the Sovereign Self.
[18] 다른 내용을 담느라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못했다. 글로벌 사우스와 비식민주의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읽어보기 추천한다. Boaventura de Sousa Santos, Epistemologies of the South: Justice Against Epistemicide (London: Routledge, 2014); Dilip M. Menon, Changing Theory: Concepts from the Global South. Rutledge. 2022; Jean Camaroff, John L. Camaroff, Theory from The South: Or, How Euro-America is Evolving Toward Africa. Oxfordshire: Routledge, 2012
이희옥 / (재)광주비엔날레 마케팅교육부 stitch06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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