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곧 읽기이다

2023.03.03 | 조회 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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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의 인문학』 리베카 솔닛

  •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느리기 때문이다. 마음도 두 발과 비슷한 속도(시속 5킬로미터 이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생각이 맞다면, 현대인의 삶이 움직이는 속도는 생각의 속도, 생각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다.
  • 키르케고르는 저술 활동 초기인 1837년의 한 일기에서 이미 소음이 사유를 돕는다는 말을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장 창의적이 되는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혼란과 소음에 맞설 때다. 그렇게 적당한 환경을 찾지 못할 경우, 내 사유는 막연한 사념을 붙잡아보려는 피로한 노력 끝에 죽음을 맞는다.”
  • 우리 몸은 ‘늘 여기에 있음’의 경험이다. (…) 움직이는 것은 몸이고 변화하는 것은 세계라는 것, 이것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세계의 유동성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고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실제로 계산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실이 둘둘 말려 있는 실타래처럼 글이 빽빽이 차 있는 책을 한 줄로 쭉 풀면, 내가 쓴 책 한 권의 길이는 6킬로미터가 넘는다).
  •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이 된다.
  • 보행을 중요한 행위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불순함이다. 보행이 풍경, 생각, 만남과 불순하게 뒤섞일 때, 걸음을 옮기는 육체는 마음과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세상이 마음에 스며든다.
  • 역사의 바탕은 개인의 일이 사회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까를 가늠해보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역사를 짊어진 마음이 먼 곳으로 가는 이유는 자기가 하는 일이 거기서는 무슨 의미일까 가늠해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렇게 등산을 계획할 때마다 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지는 이유는 이런저런 봉우리를 오른 최초의 여성이라는 시시한 명성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행복이 뒤따르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앙리에트 당제빌
  • 보행은 시민권의 시작일 뿐이지만, 이 시작을 통해 시민은 자기가 사는 도시를 알게 되는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들을 알게 되고, 도시의 작은 사유화된 곳에서 벗어나 진짜 도시 주민으로 거듭나게 된다. 거리를 걷는 것은 지도 읽기와 살아가기를 연결하는 일, 사적 세계라는 소우주와 공적 세계라는 대우주를 연결하는 일, 자기를 둘러싼 그 모든 미궁의 의미를 깨닫는 일이다.
  • 영원히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혁명의 본질이다. 가라앉는 것은 실패하는 것과는 다르다. 혁명은 낡은 기성 제도들의 무지몽매함을 조명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계시하는 번갯불이다. 혁명의 빛을 받았던 것을 예전 그대로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모종의 절대적 자유, 혁명이 극에 달했을 때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품는 희망 속에서만 생겨나는 자유를 위해서다.
  • 보행은 인간 문화라는 밤하늘의 성좌로 자리 잡았다. 그 성좌는 육체, 상상력, 드넓은 세상이라는 세 별로 이루어져 있다. 세 별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보행의 문화적 의미라는 하나의 선이 별들을 이어 성좌로 만든다. 성좌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설정이다. 별과 별을 잇는 선, 곧 성좌는 과거 사람들의 상상력이 지나간 길이다. 보행이라는 성좌에는 역사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반란자들, 무단횡단자들과 호객 창녀들과 순례자들과 관광객들과 정글 탐험가들과 등산가들이 두 발로 디뎌서 만든 역사다. 다만 이 역사에 미래가 있는가 여부는 아직 그 길들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문을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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