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넝마주이
매일 버리는 쓰레기지만 누군가는 그 쓰레기를 통해 살아간다. 쓰레기는 폐기물 그 이상, 사회의 거울이고 그림자다.
그들은 어린 부랑아였다. 작게는 6세, 많게는 24세 정도였는데, 사회변동에 휘말려 불안정한 처지가 된 이들이었다. 가장 큰 변동요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해 보호자가 사망했거나 보호자와 이별한 채 혼자 남아 자란 아이들이었다. 또 가난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혼자 남거나, 농촌서 상경한 후 생활고를 겪는 아이도 있었다.
망태와 꼬챙이를 들고 다닐 만한 힘이 있는 큰 아이들은 넝마와 폐품을 주웠고, 그만한 힘이 없는 아이들은 나무로 된 구두통을 들고 다니며 구두를 닦았다. 돈 계산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은 껌이나 신문을 팔았고, 이보다도 작은 아이들은 구걸을 도맡았다.
과거의 넝마주이, 즉 부랑아로 구성된 넝마주이는 이제 없다. 새로운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이 넝마를 주우리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이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노인’이다. 이들은 과거의 넝마주이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거닐며 폐품을 줍고, 고물상에 되판다. 여전히 이 일을 하는 이들에 대한 보호는 없다. 각자도생이란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늙어가는 몸의 고통을 참으며 외롭게 걷고 줍고 파는 일을 할 뿐이다. 2022년, 병들고 늙은 넝마주이들이 살고 있다.
# 일단 시작하기
나는 살바도르 달리의 ‘완벽하려 하지 마라. 어차피 완벽할 수 없을 테니까.’란 말을 좋아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꾸만 딴짓하던 나를 돌아보면, 과연 나는 완벽함의 허상에 사로잡혀 중요한 일보다 당장 내가 이룰 수 있는 일들로 분열하곤 했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흠집들로 아예 시작을 하지 못하거나, 시작을 했더라도 이내 주저앉는 결과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변명 없는 묘지는 없겠지만, 계획 없는 시작은 있을 수 있다. ‘시작’이라는 말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이라는 단어에 완벽하게 매몰되어 버린다. 시작부터 그것을 추구하느라 시작조차 못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게 필요하다. 오히려 과정을 중시하게 될 때, 우리는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완성에는 가까워질 수 있다. 때로 과정에서 오는 결과는 하나 이상일 경우도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시작하고 끝맺으려 할 때보다 양질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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