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 하는 여자
내가 20대 초반에만 해도 북유럽풍 카페는 줄을 설 정도로 인기였다. 사실 카페 뿐 아니라 펜시점의 북유럽풍 인테리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눈요기였다. 내 머리 속에 매체나 이런 인테리어가 주는 유럽 실내 이미지는 우리 집보다 세련되고,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그렇게 꾸며보고 싶은 로망은 늘 있었다. 그림 속. 칼 라르손 아내의 바느질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배치된 가구와 액자, 식물들의 배치와 색감이 여인의 바느질을 더 예뻐 보이게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정에서 주부가 할 일이 고상하고 우아한 것은 아닐 것인데 칼 라르손의 바느질하는 여자는 편안하고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는 자의 마음상태가 평안하고 여유로울 때 가장 꾸밈이 없는 상태의 그림이 나온다. 가정 생활이 편안하면 말투와 말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칼 라르손이 집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녹아있고, 8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도 남 다른 자녀 사랑이 엿보인다. 평범함이 비범함이라하고 하는 데 평범함이 제일 어렵다.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웃고 있는 것 같다. 집, 마당, 잔디밭, 나무, 테이블이 웃고 있다. 색이 웃고 있다. 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웃고 있다. 선들이 웃고 있다. 새빨간 수납장이 아주 상큼하게 웃고 있다. 이 집 식물들은 어느 집보다 싱싱하며 생동한다. 바느질 하는 여자가 고개 숙여 바늘에 시선을 쫓으며 웃고 있다. 칼 라르손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웃고 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모두 환하다. 식구가 많을 텐데 저 많은 옷감을 언제 바느질을 끝내나 생각도 든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예쁘고 아름답기에 남겨두고 싶은 한 장면이라 이 순간을 그렸을 것 같다. 칼 라르손의 작품들을 그때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편안함. 행복함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바느질 싫은 여자
나 어릴 적에 우리 엄마가 바느질 하셨던 장면들을 더듬었다. 엄마는 바느질을 버거워 하셨다. 큰 이불을 바느질 할 때면 이불 껍데기 속에서 나와 동생이 들어가 까르르르 거렸는데 엄마의 신경질을 내셨던 생각난다. 아마도 7~8 살 쯤이였을 거다. 그 땐 그게 재미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나는 엄마 눈치를 보았다. 엄마의 마음 상태가 불안함의 연속이였다. 아빠와의 불화로 큰 소리가 오가고 엄마가 우는 것으로 끝맺었다. 며칠씩 분위기가 초상집 분위기 못지 않았는데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도 두 분은 헤어지지 않으시고 암울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바느질이라는 것은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일, 떨어진 단추를 자기자리에 잘 매달아 놓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바늘귀에 실을 넣는 순간부터가 애정 없이 할 수가 없다. 마음 상태가 안좋으면 바늘귀가 작은 것부터, 실 끝이 꼬부라져 자꾸만 들어가지지 않는 것부터 짜증이 나니까. 늘 고단하고 삶이 팍팍하니 아빠에게 그 탓을 돌리며 살았던 엄마는 마음이 꼬여서 구멍 난 양말을 꿰어 신어야 하는 상황을 두고도 매우 슬퍼했던 것 같다. 한 여인의 삶의 회한과 외로움을 가득 담아내어 힘없이 한 땀 한 땀을 이어간 바느질. 엄마의 어두움이 어린 나에게 온몸으로 느껴지니 아마도 난 그 정서를 반복, 누적 경험했고 내 안에 해소되지 않은 우울함이 쌓여갔다. 그 분위기에서 뛰쳐 나올 수 있는 것은 내가 경제적으로 힘이 생겼을 때 였고 도망가듯이 결혼 생활을 선택했다. 막 돌이 된 아들의 자그마한 외투에서 떨어진 노랑 단추는 참 작기도 작다. 다행히 내 시선에 멀리 도망가지 않아 뱅그르르 돌다 이내 멈추면 주워서 원위치 시키기 위해 바늘통을 꺼낸다. 아이의 작은 외투, 돌고 돈 단추군 , 날 기다리는 바늘과 실. 누가 이 장면을 그린다면 이 장면은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중학교 때 십자수가 대유행을 해서 서로 십자수를 만들어 친구들 사이에 선물도 하곤 했다. 난 작은 열쇠고리 십자수 하나를 사서 시도하다가 문지방으로 확 던져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열을 맞추고 색을 맞추어가며 바늘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행위가 그렇게도 식은 땀이 났다. 그냥 하나 사지? 내가 거기에 몰두한 친구에게 던진 한마디다. 그것이 나에게 던진 말이기도하고. 여자가 아닌 선머슴인가? 미동도 없이 한 곳을 응시하며 반복하는 바느질이나 십자수, 지점토로 만들기, 비쥬로 팔찌 만들기, 목걸이 만들기는 어후, 손사래 쳐지는 행위다. 말괄량이 삐삐처럼 나가 자전거타기, 달리기 , 올라가기, 잡기 놀이에 능했다.
아이를 낳고 내가 손사래치던 바느질을 하게 되다니! 내 모습이 좀 우습기도 했다. 엄마가 되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 하기 싫던 것도 썩 나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애정이 있으니 바늘귀에 실 들어가는 몇 초에서 몇 분사이가 그리 즐겁다. 결혼 전이라면 내 옷에 덜렁덜렁 곧 낙하하실 단추님을 대응하는 자세는? 고민도 없이 애정없는 그 바느질 행위를 포기하고 그 옷을 입지 않으면 그만인 것으로. 아이의 엄마로 살다보니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아이에게 맞춰지고, 생각과 목표가 아이를 중심되고 그러면서 나는 웃고 있다, 누가 나의 일상을 찍어준다면 모두가 스마일. 한 컷 한 컷 스마일일 것이다. 뭐 때론 아이의 투정과 떼로 지붕 뚫고 하이킥하고 싶을 때도 상당히 자주 오지만 다 자고 일어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있다
바느질 안하는 여자
나보다 섬세한 두 양반(남자 1호, 남자 2호)은 어깨가 2cm정도 터진 나의 여름 원피스를 꿰매 주겠다며 서로 나선다. 남자 1호는 군인 시절 바느질 경력을 운운하며 나의 바느질 실력을 비웃음과 동시에 자동 우쭐 모드다. 남자 2호가 자기도 바느질을 시켜 달라고 하여 헌 천을 꺼내주었다. 고사리 손으로 실을 바늘 귀에 옮긴다. 제법이다. 한 방에 잘 들어간다. 가장 기본적인 바느질 법을 알려주니 한참을 몰두 하던 2호는 8살이지만 반듯 반듯하게 줄을 잘 세웠다. 나보다 낫다! 내 피가 아니고 아빠 피다. 신통하기도 하다. 난 바느질을 안 하기 시작했다. 살짝 터진 옷도 남자 1호가 다 해 놓는다.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지. 난 애들하고 씨름이나 하면 된다. 아이를 잘 잡고 팍 하고 쓰러뜨리는 스릴에 나도 재밌고 2호 3호 님의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는 시계 바늘 같다. 이 장면을 칼 라르손이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우리 집 시계가 웃고 있을 것이다.
칼 라르손의 바느질 하는 여자 옆에 옷감이 테이블에 한 가득 이다. 아이만 8명이니 한참 그러고 있다가는 거북 목이 될 거다. 예뻐 보인 다는 것은 내 맘이 행복하다는 거다. 칼 마르손이 예뻐 보여서 집안의 찰나들을 그렸다. 누가 보아도 행복을 그린 거라고 하지 않는가?
어찌 되었든 나는 바느질을 안해도 이뻐 보이는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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