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야만 비로소 생기는 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너울거리는 물결을 박차고 날아올라 꿈을 좇아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나비는 오랜 시간 해외에서 고독과 성장의 시간을 견뎌낸 작가를 닮았다. 고요히 숨을 들이쉬며 자연을 벗 삼아 거닐던 시간이 없었다면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와 훨훨 날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비의 우화 과정을 오랫동안 참고 지켜볼 생각이 없었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나올 채비를 하는 나비를 돕기 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 번데기의 구멍을 키웠다. 조르바의 입김 덕에 예상보다 빨리 세상 밖으로 나온 나비는 결국 제대로 날개를 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비에게 필요했던 건 어서 밖으로 나오라는 재촉이 아니라 기다림이었고, 누구도 요구한 적 없는 성급한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번데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를 기다리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지혜였다.
갤러리 반포대로 5에서 열리는 ‘쉼’을 주제로 한 박숙현 작가 개인 초대전(5.28~6.2)에서 고요한 ‘쉼’의 순간이 어떻게 우리에게 과거의 역경을 극복할 의지와 현재를 살아갈 지혜, 미래를 열 꿈을 안겨주는지 직접 확인해 보자.
꿈을 싣고 고국으로 돌아온 나비
백 년 세월은 한 마리 나비의 꿈같도다
과거사를 돌아보니 모두가 덧없는 것을
오늘 봄이 오면 내일 꽃이 지나니
벗이여, 어서 술잔을 드세
저 등불이 꺼지기 전에
-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Die Witwe des Schmetterlings)> 도입부 합창곡
종잇장보다 얇은 날개를 가볍게 퍼덕이는 나비가 되어 허공을 가르던 장자는 꿈에서 깨어나 왜 이런 꿈이 반복되는지 노자에게 묻고, 노자는 나비였던 전생의 영혼이 장자에게 남아 자유를 갈망하는 탓이라고 일깨워 준다.
동양철학과 서양음악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천재라는 평가를 받은 한국 작곡가 윤이상이 동베를린사건(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라 불리는 6.8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던 1967년 여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200여 명의 지식인이 동베를린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북한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고를 치르며 써 내려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첫 장면이다. 영원한 집권을 꿈꾸며 왕좌를 틀어쥔 일그러진 영웅은 들불같이 번지는 시위를 진압하고 여론을 돌리기 위해 당시 모든 불만을 잠재우는 묘약으로 남용되곤 했던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렇게 기획된 간첩 몰이에 휩쓸린 수많은 지식인이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독일에서 활동했던 윤이상도 그중 하나였다. 날개가 꺾여 나락으로 떨어진 나비 신세가 된 윤이상은 나비 꿈을 꾸는 장자와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노자의 입을 빌려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무위(無爲)의 삶을 노래했다.
그는 훗날 당시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두고 “몸은 비록 옥중에 있었으나 마음만은 갇혀 있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이런 고백에 미뤄볼 때 윤이상의 나비는 자신을 옥죄는 참담한 현실을 차라리 꿈이라고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고난을 이겨내고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상징한다.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예술혼은 한 편의 오페라가 되어 창살 안에 갇힌 그의 육신을 뒤로 하고 독일로 훨훨 날아가 박수갈채를 받았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꿈속의 나비에게 자신을 투영한 그에게도 살아생전에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조국 땅을 다시 밟고 싶다는 염원을 가슴 깊이 묻고 살았던 그는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지난 후에야 그 어떤 족쇄도 없이 자유롭게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어 푸른 바다가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고향 땅 통영에 묻히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
꿈을 찾아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꿈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모두에게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또 하루를 살아내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옥고를 치르면서도 정신의 자유를 갈망하고 자신을 무참히 버린 고국을 그리워했던 윤이상의 꿈을 담은 나비는 세월을 건너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근간으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나가겠다는 꿈을 한지에 담아낸 박숙현 작가의 그림 속에 내려앉았다.
10여 년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치유작가 sue’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박숙현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다니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설 것을 권한다. 세상에는 멈추어 서야만 보이는 꿈이 있고, 쉼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 있다.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돌아보며 꿈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낭비라고 여기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없다.
박숙현 작가의 그림은 분주하게 돌아가는 인생의 급류에 휘말려 꿈을 되짚어볼 새도 없이 지금, 이 순간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잰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마구 뒤헝클고 헤집는 생각의 편린은 그녀의 손에 걸린 붓에 낚여 다양한 색깔의 작은 점이 된다. 허물을 벗으며 쑥쑥 자라난 애벌레가 번데기 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견딘 후 나비가 되듯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없이 커져 버린 불필요한 잡념들은 그녀가 종이 위에 그려낸 차분한 색 점 속에서 평온한 숙고와 고요한 사려로 거듭난다.
쉬어야만 비로소 생기는 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너울거리는 물결을 박차고 날아올라 꿈을 좇아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나비는 오랜 시간 해외에서 고독과 성장의 시간을 견뎌낸 작가를 닮았다. 고요히 숨을 들이쉬며 자연을 벗 삼아 거닐던 시간이 없었다면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와 훨훨 날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비의 우화 과정을 오랫동안 참고 지켜볼 생각이 없었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나올 채비를 하는 나비를 돕기 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 번데기의 구멍을 키웠다. 조르바의 입김 덕에 예상보다 빨리 세상 밖으로 나온 나비는 결국 제대로 날개를 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비에게 필요했던 건 어서 밖으로 나오라는 재촉이 아니라 기다림이었고, 누구도 요구한 적 없는 성급한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번데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를 기다리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지혜였다.
갤러리 반포대로 5에서 열리는 ‘쉼’을 주제로 한 박숙현 작가 개인 초대전(5.28~6.2)에서 고요한 ‘쉼’의 순간이 어떻게 우리에게 과거의 역경을 극복할 의지와 현재를 살아갈 지혜, 미래를 열 꿈을 안겨주는지 직접 확인해 보자.
* 글쓴이-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브런치
오마이뉴스
링크트리
#이은새 #밤의괴물들 #비#살롱드까뮤 #그림에세이 #미술에세이 #번역가김현정 #iamwriting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