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푸른 바탕에 하늘색, 초록색, 핑크색, 연노랑색들이 점점이 어른거린다. 크기도 작기도, 진하기도 흐리기도 한 점들이, 끼리끼리 때로는 홀로 캔버스 위를 떠다닌다. 네모난 캔버스 공간에 한점이라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색점들. 우주라는 이 공간에 한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 너, 우리.
칼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몸 속 세포안에서도, 핵주위를 전자들이 돌고 있다고 한다. 세포 수준까지 들어가 보면, 우리도 거대한 우주의 일부인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나도 너도 우리도, 작가의 작품도 모두 우주다.
지구
캔버스 위에 바람이 분다. 파란 수면이 물결치고 초록 잎들이 춤을 추고, 붉은 꽃잎들이 흩날린다. 어제도 바람이 불었고 오늘도 바람이 분다. 내일도 바람이 불 것이다. 매일 불어오는 바람처럼 어제 내 옆에 있던 것이 오늘도 내 옆에 있고, 내일도 내 옆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제의 바람은 오늘의 바람이 아니고, 내일의 바람은 오늘의 바람과 같지 않다. 그러니 지금의 바람을 만끽하자.
집
아이를 키우며 더욱 그것을 느낀다. 아이가 갓난아이였을 적엔 매일매일 그 아이가 갓난아이일 것 같았다. 우는소리로 날 불러제낄 땐, 모른 척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이의 갓난 적 영상을 보면, 우는 소리도 귀엽기만 하다.
매일의 반복 같던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새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가 매일매일 사춘기 소년일 것만 같다. 갓난 적처럼 울어 제끼진 않지만, 매일 늦게 일어나서 지각하고, 동생과 다투고, 공부하는 것은 본 일이 없고, 무슨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마지못해 대답만 한다.
화성시는 고입 비평준화 지역이다. 서울은 35년전에도 평준화였는데 이 무슨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정책인가? 아이의 아버지는 사교육 반대론자이다. 중학교때는 고등학교는 보내야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를 설득해 과외를 했다.
2년간의 사교육 결과, 다행히 가까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입학했으니 사교육을 끝내라 했다. 내가 반대하자, 과외수업 후 1시간의 예복습과 외출을 금하면, 허락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아버지의 제안을 들은 아이는 “조건이 있으면 안 하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답하고는, 공부를 쭉 안 하고 있다.
그런 아이를 보자니 내 불안감은 요동친다. 사람은 누구나 앞일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앞일을 생각하면, 내 통제 밖의 일이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식 일에는 그 불안감이 더하다.
내가 세상에 그 아이를 내놓은 당사자로서, 그 아이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개체를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모두가 사교육을 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우리 아이만 사교육을 안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예복습1시간과 외출금지’조건을 폐지하고서라도, 아이의 사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인지? 다 같이 손잡고 사교육 시키지 말고,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게 두자고 외치고 싶다.
내가 좀 이상주의자적이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이가 공부를 했으면 싶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게라도 한 문제 더 맞고, 더 상위권의 대학에 진학할지가, 초유의 관심사다. 맞고 틀리고가 중요하다.
틀릴까봐 내 의견을 표현하기가 주저된다. 언제나 정답을 맞추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면서, 아이가 배우는 것을 즐기게 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매일 불어오는 바람처럼 항상 내 옆에 소년으로 있을 것 같지만, 문득 뒤돌아 보면 내 곁에 소년으로 있던 아이를 그리워하리라. 지금의 소년을 만끽하자.
글쓴이_김경애
미술심리상담사, 미디어지도사, 퍼스널컬러 강사, 사회복지사,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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