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 시작
태곳적에 이야기가 있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학교 운동장에 앉아 저 멀리 두 개의 산등성이 사이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바다에 눈을 고정하고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의 귓가에 들려온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구기호에 따라 분류돼 서늘한 2층 벽돌 건물 내의 기다란 서가에 차례차례 꽂힌 수많은 책 속에 감춰져 있었던 무수히 많은 단어가 공기 중으로 날아올라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카뮈의 소설 속에 등장한 알제리의 좁은 골목길을 끈적하게 휘감았던 뜨거운 공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한여름의 습도를 견디며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절의 맥락 없는 대화가 아이의 머릿속에 길고 긴 이야기의 씨앗을 심어놓은 걸까?
아이의 머릿속에 뿌리내린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방대해지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단어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웃자란 이야기의 가지에 걸리는 날이 허다하고 마구 뒤엉킨 거대한 단어 더미는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실타래처럼 한없이 뒤엉켜있다.
버킷리스트를 버킷리스트라 부르지 못한다면
남들이 다 하는 건 왠지 하기 싫은 반골 기질이 있어서인지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버킷리스트’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저 하면 그만인데 굳이 거창한 이유와 이름을 갖다 붙이는 유난스러움이 싫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버킷리스트 열풍에 반감이 들었던 건 내 취향과 욕망에 대한 무지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데 대한 설움을 토했듯이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사실, 무언가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면 존재감이 부각되고 의미도 한층 명확해진다. 마찬가지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모아놓은 목록을 뜻하는 버킷리스트가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데도 이유가 있다. 버킷리스트는 ‘죽다’라는 뜻의 숙어 ‘kick the bucket(양동이를 걷어차다)’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여기서 버킷은 중세 시대에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발 받침대 역할을 했던 양동이(bucket)를 뜻한다. 간수들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양동이 위에 올라섰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부러 양동이를 딛고 섰건 누군가가 양동이를 걷어차 목에 걸린 줄이 팽팽해지는 순간 생명의 불꽃은 사그라든다. 전자의 경우에는 양동이를 걷어차는 사람이 타인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똑같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을 막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는 외래어로 뒤범벅된 버킷리스트라는 단어 대신 ‘소망 목록’이라는 순화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열망과 희망, 욕망을 나열했다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소망 목록이 버킷리스트를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망 목록이라는 말로는 양동이가 넘어지는 순간 삶이 끝나버릴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절실하고 간절한 바람을 표현하기 힘들다.
나의 버킷리스트
반감과 이해를 거쳐 갈망 단계에 이른 나의 버킷리스트. 이유를 알 수 없는 혈소판 감소증으로 오늘도 한쪽 귀퉁이가 시퍼렇게 멍이 든 손바닥을 바라보면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내일이 어김없이 매일 내 것이 될 것이라는 섣부른 가정은 오만, 혹은 기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내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언제고 내 것이 아닌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무엇을 원한다고 말해도 되는지 몰라 선뜻 채우지 못했던 나의 버킷리스트는 아직 빈칸으로 그득하다. 하지만 끝없는 빈칸 위에는 나의 선명한 갈망이 담긴 단 하나의 소망, 책 쓰기가 자리 잡고 있다.
바닷바람에 나풀거리던 하얀 책장이 거침없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는 새가 되어 푸른 바다를 건너는 초현실주의 그림은 엉망으로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 이야기 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준다. 그림을 보며 아이는 생각한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몰라도 머릿속을 숨 가쁘게 휘젓고 다니는 말들을 성긴 채로 낚아채 한데 모아두면 거기에서 바로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고.
* 블라디미르 쿠쉬(1965~ 현재)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소련 해체 후 미국으로 옮겨간 초현실주의 화가로 '러시아의 달리'라고 불린다.
대표작으로는 해변에서 키스하는 연인의 뜨거운 입술을 하늘의 일부로 그려낸 작별의 키스(Farewell Kiss), 아프리카의 동물들과 악기를 연계해서 한 폭의 캔버스에 담아낸 아프리카 소나타(African Sonata) 등이 있다.
* 글쓴이-김현정
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꿈은 내 글을 쓰는 김작가. 남의 글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을 잠시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말을 잘 꿰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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