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두 번째 편지]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시간"

2024.09.28 | 조회 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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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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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안녕하세요. 9월 두 번째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여름이 끈질겨요. 추석엔 폭염 경보까지 발령됐죠. 아직도 낮 기온은 20도 후반이고요. 어떻게 보면 뒤늦게 ‘여름’이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온난화가 여름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해석이죠. 하지만 35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날씨는 이미 선선해요. 일교차도 크고요.

가을은 별명이 많아요. 독서의 계절, 외로움의 계절, 밀짚모자를 장롱에 넣어두는 계절… 사실 저는 밀짚모자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답니다. 피부에 닿으면 따갑잖아요. 휴대하기도 성가시고요.

환절기엔 무거우면서도 낭만적인 어감이 있어요. 끝난 계절은 아쉽고, 오는 계절은 설레요. 반대 감정도 존재하고요. 그만큼 복잡한 문제예요. 긴장을 늦춰선 안 돼요. 경계를 넘을 땐 위험이 동반하니까요. 자칫하면 감기에 걸리잖아요? 월경(越境)의 위험은 ‘난민’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기후 변화 시대엔 계절의 경계도 흔들려요. 인간의 몸은 기후를 상대하기엔 연약하죠. 살아남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응시해야 해요.

이번 주제는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시간'이에요. 횡단은 시대의 단어죠. 인문학의 최전선에선 학문 사이를 횡단하는 ‘학제적 연구’를 뺄 수 없어요. 실생활에서도 중요하고요.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을 어떻게 건너갈지 고민할 필요가 있잖아요. 어디를 끝으로 설정하고, 어떻게 통과해야 할까요? 신호등이 답을 알려줄까요? 같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봐요.


다시 어디론가 향하겠죠

모래시계

자, 잠시 시간을 내어 신호등을 생각해 볼까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례대로 오가는 적색과 녹색 신호의 흐름, 그에 맞춰 이동하는 수많은 자동차와 사람들. 참으로 인류 문명의 차가운 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호등은 시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질서와 규칙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죠. 인류가 산업화를 맞이하면서 시간의 개념은 분초 단위로 세분화되었고 이에 따라 시간을 잘 지키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수많은 인구가 도시로 모여듦에 따라 보다 효율적인 교통 체계를 정립할 필요가 제기되었고, 이에 신호를 통해 교통의 흐름을 통제하는 체계가 생겼죠. 뭐, 그렇다고 합니다. 이쯤에서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접어두죠.

우리 모두 살면서 한 번쯤, 횡단보도에 다다르자 냉철하게 바뀐 적색 신호에 좌절감을 토로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신호등에게 융통성 있게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신호등은 그저 제 할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이니까요.

시선을 외부로 향해볼까요. 가끔 우연히 신호등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 않나요? 말없이 휴대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 팔짱을 끼고 있는 커플, 급한 듯 손목시계를 자주 확인하는 사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고 싶다면 굳이 멀리 나갈 필요가 없어요. 그저 집 앞 대로변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확인하면 됩니다.

신호등과 엮인 사적인 고백은 어떨까요. 횡단보도에 한 편에 혼자만 신호를 기다리고 있고 건너편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는 상황이 드물게 있죠. 그럴 때마다 모두가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이 듭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만의 행복이나 근심을 떠올리고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오늘 저녁 식사에 곁들일 맥주 종류를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되려 실망할 필요도 없어요(?). 한 치 앞을 두고 걸어오고 있는 제가 그 사람의 최애 맥주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토요일에 마실 맥주는 무엇이 좋을까요. 저도 고민이네요. 흠.

어쩌면 신호등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멈춘 무질서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비추는 역할을 지닌 것은 아닐까, 하고 가볍게 생각해 봅니다. 질서 속의 자유를 볼 수 있다니, 참으로 모순적이네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신호등에서 생긴 에피소드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나요? 밀린 알람을 읽으려 휴대폰을 바라보다 청색 신호가 바뀐 줄 몰랐다거나, 모두가 잠든 새벽에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아무도 달리지 않는 도로를 가로지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거나. 무엇이 되었든, 신호등은 생각보다 우리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신호등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일렁이며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다는, 후련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도대체 무엇이 급했길래 길 건너편만 바라보며 전전긍긍했을까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건 언제까지나 신호등에 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머지않아 녹색 신호를 받아 다시 어디론가 향하겠죠. ‘인생은 형체를 도통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쳇바퀴를 타는 것 같다’는 말을 되뇌면서요.


역전의 공간 횡단보도

👒 밀짚모자

무단횡단, 좋아하세요? 저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아나키스트 같은 사람이라 거의 하지 않아요. 선망은 있지만요. 도로의 행위자들이 유연하고 질서 있게 상호작용하는 세상은 짜릿하잖아요.

저는 길거리에 관심이 많아요. 재밌는 은유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은 차에 비해 체급이 낮아서 교통사고로 치명상을 당할 위험이 크죠.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려면 다른 무기가 필요하고, 도로교통법이 보행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이유예요.

보도와 차도는 기본적으로 분리돼 있고, 차든 사람이든 정해진 구역에서 이탈해선 안 돼요. 제 위치를 벗어나면 신변이 위험해지죠. 그래서 횡단보도는 의미심장해요. 보행자는 횡단보도에서 차도를 건널 수 있어요. 운전자는 할 수 없죠. 국면이 바뀌네요. ‘뚜벅이’는 강자의 위치를 전유해요. 걸어서 경계를 가로질러요. 물론 도로의 규칙을 따라야 하죠. 완전한 일탈은 불가능하니까요.

파란불은 역전의 신호고, 기회는 성실하게 노려야 해요. 날로 먹으면 안 돼요. 저는 신호등을 경건하게 기다리는 사회 운동을 제안하고 싶어요. 간단해요. 빨간 불이 만든 잠깐의 공백을 몸으로 느끼면 돼요. 차들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인간 동료의 상태를 확인하며, 신호의 질서에서 흐름을 잡음으로써 파란불의 순간에 대비하는 의례예요.

일견 쓸모없는 행동이지만, 중요한 인문학 공부죠. 엉뚱한 상상이 불가능한 사람은 세상을 따분하게 만드니까요. 도파민 중독에 저항하는 생존법이기도 해요. 신호는 길어 봤자 2분이면 바뀌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찰나를 못 참고 스마트폰을 꺼내 봐요. 기습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즐길 콘텐츠는 기껏해야 잠금 화면 해제나 현재 시간 확인이에요. 안 하느니만 못하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김지원이 팔짱을 끼고 도로에 서 있는 장면이 있어요. 김지원이 기다리는 대상이 파란불인지 아니면 버스인지 사실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 뇌에 새겨진 명장면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거든요. 오묘한 표정으로요. 김지원은 이 사건(?)으로 직장에서 뒷담화를 당해요. 혼자 쿨한 척한다고요. 저에게 김지원은 도파민 중독에 저항하는 최후의 전사로 보였어요.

여러분은 바닥 신호등을 좋아하시나요? 예전에 제 친구 한 명은 바닥 신호등이 예산 낭비라고, 이미 신호등이 있는데 도대체 왜 바닥에까지 설치하냐며, 그냥 앞을 보라고 격노했어요. 당시 전 별다른 생각이 없었고, 친구가 ‘사소한’ 고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대로 넘기진 않았네요. 저 또한 바닥 신호등을 생각했죠. 이젠 의견이 생겼어요. 친구가 옳아요. 바닥 신호등은 문명의 퇴보예요. ‘스마트폰 좀비’가 좀비 상태를 유지하며 신호를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엔 어떤 ‘순기능’도 존재하지 않아요. 스마트폰 이용자가 늘어나는 세태에 맞춰 신호등 체계가 적응했다기보단, 스마트폰 좀비를 양산하는 테크로지의 통치술일 뿐이에요. 자연스러운 변화는 없어요. 현상이 문제라면 판국을 흔들어야 해요.

지금까지 말은 거창했지만, 사실 저 또한 도파민 중독에 절여져서 길거리에서 이어폰을 꽂고 걸어요. 하지만 저는 저 같은 사람까지 모두 포섭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같이 최소한의 저항을 시작해 봐요. 빨간 불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고 가만히 음악에 집중하기, 신호가 바뀔 때까지 주위를 계속 걷기, 바닥 신호등에 시선조차 주지 않기…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려요.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오랜만에 대학교 선배를 만나 점심을 먹었어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왕가위 영화로 이야기가 흘러갔네요. 장국영의 소년다운 사랑과 양조위의 신사적인 사랑 중 어느 것에 이끌리는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선배는 <아비정전>을 왕가위 최고의 영화로 칭송하며 장국영을 꼽았는데요. 저는 <화양연화>를 감명 깊게 봤는지라 양조위가 훨씬 마음에 들더라고요. 집에 오는 길에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Tango Apasionado>를 들으면서 왔어요. 이과수 폭포가 애절하게 그려지는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오는 훌륭한 음악이죠. 그날 하늘은 장대비를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아휘가 되어 이과수 폭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 밀짚모자: 일본 자취방에 입주했어요. 제일 싼 집으로 잡았네요. 월세에 비해 넓고, 기본적인 설비도 갖췄어요. 입지도 훌륭하고요. 교통이 불편해서 마트까지 20분, 시립도서관까지 35분, 영화관까지 1시간 30분을 걸어야 하지만, 학교는 10분이면 가거든요. 그런데 제 방은 1층 주차장 바로 앞이에요. 창문을 열어놓기 힘들더라고요. 네덜란드 사람들은 커튼조차 치지 않는다던데, 저도 그 사람들을 본받아 사회 운동이라도 할까 싶네요. 사실 창문을 닫지 않고 잠든 날이 몇 번 있어요. ‘기절 잠’이니 형광등도 켜놨고요. 어쩔 땐 음악까지 틀어놨다니까요? 명곡이 흘렀길 바랄 뿐이에요. 카네코 아야노 ‘sansan’(燦々)이라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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