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10월 첫 번째 편지의 서문을 맡은 모래시계입니다.
어느덧 날씨도 선선해졌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기까지 합니다. 싱그런 여름은 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며, 나뭇잎이 하나둘 노랗게 변하고 있어요. 올해 겨울은 무척 추울 예정이라고 하던데, 이번 가을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제대로 남길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을을 좋아하거든요.
반복되는 사계절에는 나름 소소한 장점이 있어요. 작년 이맘때쯤에는 이랬었지, 하면서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런 기회가 1년에 네 번씩이나 있죠. 여유가 있다면 미래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네요.
이번 편지의 주제는 ‘시간을 가로지르며’입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재만을 생각하고 살아가지는 않잖아요. 어떤 이는 과거를 생각하고, 또 다른 이는 미래를 생각하기 마련이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도달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다가오지만 시간의 힘을 빌리면 가능해져요.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연 어떤 성찰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한 번 같이 생각해 보아요.
기억 속의 포도나무
⏳ 모래시계
저에게는 포도나무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적의 일인데요, 그해 여름에 포도 농사가 지나치게 잘 되었는지 몰라도 한동안 후식으로 포도만 계속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포도 알맹이가 잘 영글어서 맛있더라고요. 그렇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죠. 막바지에 이르자, 상당수가 포도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일을 좋아하는 편이라 질리는 데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요.
그날도 어김없이 포도를 곁들인 식사를 마치고, 호기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포도씨를 막사 한 편에 뿌리면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포도나무로 자라지 않을까?’ 그래요, 잔반 처리통에 버려진 포도씨들이 본연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복무했던 곳은 고도가 높은 험준한 산골짜기인지라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은 아닙니다만, 독일의 모젤 지역에서는 산의 급경사면을 활용하여 최대한 많은 일조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하니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포도씨를 한데 모아 정성스레 묻지 않았네요. 단순히 귀찮아서는 아니었습니다. 우선 막사 한 편에 마련된(?) 부지는 너무 작았고, 설령 씨앗을 성공적으로 심었다고 해도 결실을 보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포도나무가 성체가 되기까지 일반적으로 3년이 걸리고, 제대로 된 열매를 얻기까지는 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곧 전역을 앞두고 있었으니, 포도나무와 함께 열매를 맺는 대장정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포도씨를 묻어보지 못한 채 전역했고, 그 후로도 가끔 포도를 먹을 때면 포도나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이름 모를 산골짜기의 포도나무를요. 어쩌면 저는 포도씨를 땅이 아닌 기억 속에 묻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막상 그것에 착수하고 실행하는 데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죠. 사실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은 오직 강인한 의지로 점철된 끈기뿐이에요. 군말 없이 축적되는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요.
끈기와 시간이 합쳐지면 많은 것이 가능해져요. 매일 일기를 쓰면 1년에 365편의 글을 쓰는 셈이에요. 수필집으로 출간해도 될 정도의 분량이죠. 매일 1km를 달린다면 1년에 365km를 달리는 셈이네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직선거리가 325km라고 하니 엄청난 거리입니다. 1년 단위로 생각해 봐도 인상적인데 인생 전체로 확장하면 결실의 정도는 엄청날 거예요.
자, 그러면 포도나무 일화로 돌아가보자고요. 대신 이번에는 결말을 다시 써볼까요. 2021년 9월에 무심코 묻어둔 여러 개의 포도씨 중 몇 개가 발아에 성공했어요. 제 후임들이 세심한 관리를 해준 덕에 추운 겨울을 무사히 버티고, 따뜻한 봄 햇살의 영양분을 받아 묘목으로 성장했죠. 대대장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고, 매년 여름마다 진행하는 예초의 위협을 이겨내어 무럭무럭 자랐어요.
어느덧 제가 전역한 지 3년 차네요. 제 후임의 후임이 알려주길, 포도나무들은 올해 가을 쯤에 이르러 성체가 되었다고 하네요. 아직 맛있는 열매를 맺기에는 이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될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죠.
몸에 묻어둔 시간
👒 밀짚모자
전화번호는 휴대전화에 저장돼요. 따로 암기할 필요가 없죠. 실제로 외우지 않고, 외우지 못해요. 뇌의 저장 능력을 위축시키기에 퇴화지만, 기능을 스마트폰으로 확장하기에 진보예요. 언제나 그렇듯 기술과 신체를 엮어내는 생존전략이 필요해요.
저는 기억력이 안 좋아요. 중요하든 사소하든 금방 잊어요. 아직 20대인데, 중고등학교 시절조차 가물가물하네요. 가장 친했던 서너 명 이외엔 동창과 만나지 않아요. 일차적으론 연고주의가 불편해서지만, 무엇보다 옛날얘기로 들뜨는 분위기가 힘겹거든요. 그들에게 반가운 일화가 저에게는 금시초문이에요. 당황스럽고, 미안하죠. 기가 빨려요. 저와 함께 있는 상대방도 비슷하게 느끼겠죠.
어려서부터 사진 찍히길 싫어했어요. 제가 존재한다는 흔적이 싫었거든요. 타인을 포착하는 권능한 시선도 불쾌했고요. 저는 옛날 사진이 거의 없답니다. 이유가 이유인지라 추억을 꼼꼼하게 정리하지도 않았네요. 안 하며 살았더니 못 하는 사람으로 자랐어요. 그러니 망각은 저에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에요. 여전히 삶을 지배하는, 지울 수 없는 인장이고요. 소중하게 간직하려고요.
‘타임캡슐’은 편지를 땅에 묻고 미래에 발굴하는 기획이에요. 애틋하고 설레죠. 저는 헤어지는 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이별은 오묘한 거리를 요구하죠. 미련한 집착은 추잡하고, 단호한 배척은 유난스러우니까요. 깊지도 얕지도 않은, 먼 듯 가까운 위치가 필요하죠. 생생하면 따분하고, 낯설면 의심스럽잖아요.
과거는 진화를 거듭해요. 캡슐엔 흙이 묻어요. 종이는 미생물과 접촉하고, 글씨는 빛이 바래죠. 인간 또한 시간을 통과하며 변해요. 그래서 타임캡슐에선 낯선 존재자들이 조우해요. 물음이 남죠. 너는 어디에서 어디로 향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10대 시절을 고물 컴퓨터와 보냈어요. 렉이 심했고, 항상 문제에 휘말렸네요. 사실 슈퍼컴퓨터여도 비슷했겠죠. 2010년 전후 인터넷 ‘낭만의 시대’는 디지털 공중보건이 최악이었으니까요. 웬만한 ‘exe’ 확장자는 의심스러웠잖아요. 저는 컴퓨터를 지키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료 백신까지 구매했다니까요? 효과는 없었죠. 최후의 생존술은 언제나 ‘포맷’이에요. 초기화된 컴퓨터는 잠시나마 멀쩡했거든요. 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당시 ‘리셋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유행했죠.
리셋 증후군은 인생을 컴퓨터처럼 초기화할 수 있다는 착각이에요. 과거를 세탁할 수 있다는 망상이고요. 제가 고등학교를 선택한 기준이기도 하네요. 집과의 거리, 교육과정, 입시 결과, 남녀공학 여부… 전부 사소했어요. ‘아는 사람이 얼마나 적게 지원하느냐’가 유일한 잣대였죠. 윈도우 XP처럼 ‘새로운 시작’을 원했으니까요.
하지만 포맷은 초기화가 아니에요.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파일이 남죠. 실물 컴퓨터도 예전으론 못 돌아가고요. 사용 이력과 먼지가 쌓이니까요. 세상의 모든 행위자는 과거에 얽혀 있어요. 사건은 이미 시작됐고, 우린 ‘새롭게’ 시작할 뿐이에요.
이 글을 쓰며 밥 딜런과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들었어요. 저는 옛날 음악을 좋아하는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경계해요. 아네모이아(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향수)를 언급하는 음악 비평을 읽어본 적 있나요? 예전에 유행했는데, 대개 내용이 없거나 뻔뻔하게 쓰였어요.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을 대체하니까요. 저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만나는지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엉뚱하게 서술해야 뛰어난 해석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에서 피사체와 투사체가 얽히듯, 추억은 양방향으로 흐르니까요.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여느 때와 같이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탔어요.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은 무척이나 기묘해서 이랑의 노래 <슬프게 화가 난다>가 흘러나왔어요. 현실을 직시하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휴대폰 속 세계로 도피한 듯 보였어요. 하지만 사실 이 노래는 굉장히 중의적이에요. 여기서 ‘화가’는 화(火, anger)가 될 수도 있고, 화가(畵家, painter)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이랑은 화가 이두원의 개인전 ‘슬프게 화가 난다’에서 영감을 받아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요. 저는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마련이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비좁은 지하철, 배낭을 앞으로 메어 작게나마 허락된 저만의 공간 속에서 노래를 한 번 더 들었어요. 이번에는 조금 더 밝게 들렸어요.
👒 밀짚모자: 최근 니시카와 미와 영화에 빠졌어요. <유레루>로 유명한 감독인데요, 지겨운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요. <산딸기>의 욕조 솔질이나 <유레루>의 방바닥 걸레질은 조용하게 압도하죠. 좋은 장면은 몸에 각인되고, 저는 그 만남이 짜릿해서 영화를 찾아봐요. 어제 부국영이 폐막했다고 하네요. 영화제는 예상치 못한 시각과의 조우이며, 영화를 핑계 삼아 떠나는 여행이에요. 내향인도 즐길 수 있는 축제고요. 비록 저는 가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멋진 행사가 지속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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