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 번째 편지] "추석"

2024.09.14 | 조회 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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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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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안녕하세요. 9월 첫 번째 인사말을 맡은 모래시계입니다.

날씨도 9월에 접어든 사실을 알았는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낮의 무더위는 아직 남아있네요.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가 가로수에 둥지를 튼 까치와 조우했어요. 어설픈 모양의 둥지에 위태롭게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한참을 바라보다, 뒤늦게 녹색 신호로 바뀐 것을 알아채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사는 동네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네요. 녀석, 둥지를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제는 ‘추석’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우연히 까치를 만났고, 기나긴 추석 연휴의 첫날이 마침 편지 배송일이니까요.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까요. 추석이랍시고 모두가 정해진 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번 추석만큼은 여러분이 색다른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요.

아, 물론 그 전에 편지부터 읽어보시죠.


강강술래를 하는 가족은 없겠죠

모래시계

추석, 어떻게 보내실 생각인가요?

보통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올해도 역시 시골에 내려갈 계획이에요”라고 하거나 “이번에는 성묘도 하려고요”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궁금한 건 추석에 무엇을 하느냐는 거예요. 온 가족이 모여 윷놀이를 즐길 수도 있고, 강강술래를 할 수도 있잖아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요.

우리 가족은 추석 아침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진행해요. 할아버지께서 신학대학교를 나오셨거든요.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추석 때의 예배는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해요.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묵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괜스레 저도 신성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참에 하나님께 제가 바라는 행복이나 목표를 살짝 읊기도 해요. 과연 제 말을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추석도 유연해지고 있습니다. 엄격한 전통을 따르지 않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는 경우가 존재하는데요, 어느 가족은 차례상에 과자를 놓는다고 해요.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족도 있을 터이고요.

우리 가족도 먼 친척들을 보러 시골로 내려가지 않은 지 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촌수가 높은 친척과는 자연스레 멀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가끔 시골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큰집 바로 옆에 고개 숙인 벼로 가득 채워진 논을 볼 적이면 자연스레 내면의 평화를 되찾고는 했는데, 어쩌면 고등학생 시절에 무심코 바라본 때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슬픈 예감이 드네요.

전통의 색채가 희미해지고 새로운 문화가 떠오르는 것을 나쁘게 바라볼 필요는 없어요. 시대에 따라 사회는 늘 모습을 바꿔왔죠. 그 변화의 과도기 시점에 저희는 애매하게 끼어 있을 뿐입니다.

어찌 됐든, 추석 때마다 전통이었다는 이유로 강강술래를 하는 가족은 아마 없겠죠. 그래도 어딘가에는 그런 가족이 있기를 바라요. 세상에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만약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요. 분명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는 가족임이 틀림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다 같이 모여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이라면 그다지 엄격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을 것 같네요.

추석 하면 역시 귀성길과 귀경길을 빼놓을 수 없어요. 그런데 비밀을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요. 저에겐 숨이 턱 막히는 교통체증을 해결할 만한 어설픈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로의 모든 운전자가 정확히 같은 시각에, 같은 속도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다란 기차처럼 동시에 움직이는 겁니다. 원래 맨 앞의 차가 출발하면 다음 차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출발하잖아요. 교통량이 많지 않다면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추석과 같은 날 고속도로에서 이런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면…이쯤에서 그만하죠.

몇 번의 연습을 거치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마치 군대에서 배웠던 제식 훈련처럼요. 현실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율주행 시대가 도래하면 더욱 모를 일이죠. 하지만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말이죠. 그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고생 좀 해야겠군요.

아무튼 추석, 어떻게 보내실 생각인가요? 사실 이건 제가 진지하게 궁금한 점이기도 합니다.


명절에서 도망치기

👒 밀짚모자

얼마 전까지 명절엔 친척끼리 모여야 한다는 압박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명절은 가구 단위 휴가로 변하고 있고요. 저는 명절을 보내는 방법이 다양해져서 기뻐요.

현역 ‘MZ’로서 명절 문화에 불만이 많거든요. 어색한 사이인데도 가족이랍시고 친한 척 만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요. 장소는 굳이 ‘큰집’이어야만 하고, 맛있지도 않은 명절 음식을 잔뜩 만들어 쓰레기를 양산하죠. 남자들은 놀고만 있고요. 저도 남성이에요. 눈치만 보고 있네요. 기껏해야 설거지 정도를 하고, 보통은 아저씨들이 하는 얘기를 한 귀로 흘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격렬하게 생각하거나, 급한 과제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방에 틀어박혀요.

우리 가족은 감정 관계가 최악인데, 명절에는 모여요. 만나면 싸우기만 하죠. 엄마는 “힘들 땐 가족밖에 없다.”고 강조하는데, 저는 가족이 없으면 힘든 일 자체가 줄어든다고 확신해요. 남는 시간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 되죠. 가족이 해체(?)되고 있으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 영화를 보면 좋겠네요. 지금은 <어느 가족>이 떠올라요.

오락 영화도 좋아요. 방금 슈퍼히어로 영화를 상상했어요. 배경은 한국이고, 레퍼런스는 <범죄도시>에요. <범죄도시>에선 압도적으로 강력한 마동석이 악당을 때려잡잖아요? 그런데 악당이 인간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추석, 설날, 제삿날과 싸워야 한다면요? 저항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해져요.

추석이라는 글자를 빨간 펜으로 쓴다거나, 포춘쿠키를 오마주해 송편 속 재료를 영국에서 시작된 저주의 편지로 구성해 일격을 가할 수 있죠. 아니면 판타지로 연출할 수도 있어요. 그래픽으로 구현된 ‘추석’이라는 글자가 마동석과 초능력 대전을 벌이면 되겠네요. 물론 마동석은 육탄전이죠. 글자 괴물 추석이 발사한 레이저를 가볍게 피하고, ‘추’와 ‘석’을 양손으로 잡아 찢는 액션은 상상만으로 ‘도파민’이 폭발해요. 하지만 저는 관념적인 방식에 끌리네요. 명절을 상징하는 괴물이 등장하고, 마초적인 힘을 배제한 마동석이 엉뚱한 의식으로 제령을 해야 하죠. 예를 들어 부산행 KTX 열차에 껌딱지를 붙이면, 추석 윷놀이 괴물은 방바닥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게 돼요. 엿처럼 달라붙어요.

하지만 현실엔 정의를 구현할 영웅 따위 없어요. 우리가 직접 해야 하죠.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은 아마 나이가 어리고, 가족 내에서 자원이 얼마 없을 거예요. 싸움은 힘들죠. 저는 도망을 제안하고 싶어요.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빠져나간다면, 우리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사회 운동이라고 믿어요. 코로나가 다시 유행해서 조심해야 할 것 같다거나, 지금 재밌는 영화가 많이 개봉해서 꼭 봐야만 한다거나, 환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자동차를 탈 수 없다거나…. 저는 여러분과 연대하고 싶네요.

대학생인 저는 ‘치트키’를 썼어요. 일본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왔거든요. ‘어쩔 수 없이’ 참여할 수 없죠. 사실 일본은 학기가 10월에 시작해서 명절을 충분히 한국에서 보낼 수 있지만, 대의를 위해 ‘하얀 거짓말’ 정돈 감수해야죠. 우리 같이 도망쳐요.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날씨는 여전히 덥지만, 가을 느낌을 내려고 가을 음악을 듣습니다. 그런 음악이 있냐고요? 가을과 어울리는 음악이라면 그게 바로 가을 음악이죠. 요즘은 비틀스의 <Rubber Soul> 앨범을 듣고 있네요. 적당히 신나는 분위기가 매력적인 명반이죠. 아, 김오키의 음악도 적절합니다. 하지만 기온이 조금 더 내려간 다음에 들으려고요. 쓸쓸히 하강하는 낙엽을 바라보며 듣는 재즈 음악만큼 훌륭한 것은 없으니까요. 어서 빨리 적당한 추위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 밀짚모자: 유학생 보험에 가입했어요. 보험에 들 생각은 없었지만, 교환학생 절차상 필요했거든요. 철저하게 가격만 고려해 저렴한 조건으로 잡았어요. 사망 보험금이 최대 3천만 원까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제 목숨값이 얼마여야 만족할지 잠깐 고민했고, 어차피 죽은 이후는 알 바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과감하게 결제를 강행했고, 사실 정신승리는 정신이 패배했다는 뜻임을 깨달았으며, 지금의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아 절망스러웠고, 사실 몇 명 있었지만 만성적인 귀찮음이 다른 감정을 압도했네요. 제가 하는 고민은 기껏해야 ‘내일 뭘 먹을까?’ 정도인데, 그나마 심오한 얼굴로 고르고 싶어서 이민휘 <빌린 입>을 즐겨 들어요. 앨범 자체가 명반이고, 저는 ‘부은 발’을 제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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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e_balance의 프로필 이미지

    wide_balance

    1
    3 months 전

    모래시계님의 정체 해결 제안은 너무 전체주의적인 듯한데요 ㅋㅋ 원래 인간은 위기 시 대처법을 전체주의적인 방도를 찾아내곤 한다만, ㅋㅋ. 저도 웃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면 꽤 합리적인 방도의 제안이 나타나지 않을까 합니다. 밀짚모자님의 생각은 늘 명절마다 찾아오는 남성의 죄의식이랄까요. 저의 큰집은 조금 특이하게? 해체했는데, 살아있는 자신의 어머니가 행복한 게 우선이다!라고 하셔서 (저에게 큰할머니) 어머니를 데리고 명절마다 여행을 가십니다. 그 덕에 저희 집안은 차례라는 행위에서 벗어났답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불공평한 차례 문화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움 해소 문화가 자리 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재밌네요. 이걸 고향 내려와서 읽으니까 조금 새롭습니다. 어릴 때는 솔직히 지루하고 잔소리만 듣는 명절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제는 좀 즐겁습니다. 명절이 순기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나 봅니다. 다들 명절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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