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4월 두 번째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매화, 목련, 벚꽃, 개나리가 동시에 핀 봄이였어요. 기후위기 증상이라는데, 예쁘더라고요. 저는 아름답게 읽히는 절망에 관심이 많아요. 죄악감과 얽힌 미감은 중요한 공부가 되거든요.
얌전한 음악, 우중충한 영화, 내향적으로 웃긴 책, 금요일의 학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인지 추구하는 성격도 ‘한두 마디만 나눠도 기운이 쏙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자주 지적 받고, 저도 인지하는 단점인데요, 애써 ‘추구미’로 포장하고 있네요. 발상을 바꾸면 나름의 매력이 생기거든요.
이번 호 주제는 ‘약속의 정치학’입니다.
저는 내향성에 까다로운 내향 근본주의자예요. 매주 약속을 나간다면, 내향형 자격을 몰수해야 해요. 이삼 주에 한 번이 적당하죠. 물론 여럿이 모이는 자리는 절대 안 되고, 둘이서 만나는 상황만 인정해요. 약속은 빈도보다 밀도가 중요하기도 하고요. 사람이 늘면 대화의 효율이 떨어져요.
슬슬 약속을 잡을 때가 됐네요.
회피형 약속의 대가
👒 밀짚모자
제 친구들은 회피형 성향을 경멸해요. 그런데 그들은 제가 회피형이라고 주장해요. 인터넷에서 유사 심리 테스트를 받으면 실제로 ‘불안회피형’이라는 진단이 나오지만, 억울해요. 거기서 회피형이 나오지 않는다면, 뻔뻔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회피형 성향을 자랑스러운 정체성으로 전유했어요. 다정하고 세심하며 배려심이 깊은 성격으로요.
연초 목표는 언제나 똑같아요. 친구 한 명 사귀면 성공이에요. 인간관계를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하니까요. 밀도 조절이 중요해요. 처음엔 부담스럽고 진득하게 만나고, 안정을 찾으면 거리를 벌려야 해요. 높은 밀도를 오래 유지하면, 인성이 망가지거든요. 가끔씩 한두 번 대화하면 충분하죠.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예요. 삶은 외로움에 적응하는 훈련이죠.
지론은 거창한데, 실현은 힘드네요. 서로를 경계하는 상태에서 저는 성급하게 접근하고, 상대방은 도망가요. 망친 우정이 아주 많아요. 실패를 반복하니 위축되더라고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다가가기 힘들어졌어요. 소극성은 기존의 관계까지 확장됐고요.
보고 싶어도, 웬만하면 만남을 제안하지 않아요. 평소 연락도 안 하고 살고요. 친구들도 저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정신승리만이 살길이에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내는 우리가 가장 멋지다고 믿어요.
생활은 인격으로 굳어져요. 언제부턴가 함께 하는 식사가 불편해졌고, 연락이 성가셔졌으며, 낯선 사람이 두려워졌어요. 기분이 나쁜 날에는 대중교통 빈자리도 거부해요. 누군가와 털끝이라도 스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요.
약속을 잡는 방식도 옛날과 달라졌네요. 예전엔 생각 없이 연락해 갑작스레 만나는 번개가 편했는데, 이제는 굳이 한두 달 뒤를 기약해요. 고도의 생존 전략이에요. 거절이 무섭거든요. 최대한 안 아프게 겪고 싶어요. 재회에 집착하고 있지 않는 듯한 연기를 해요. 갑작스럽게 연락하고, 한참 뒤에 보자 하면 완벽하죠. 기간에 여유가 있으니 상대방이 거절하기 힘들고, 한다 해도 타격이 적어요. 저는 애당초 여유로운 위치를 선점했으니까요. 도중에 펑크가 나도 괜찮아요. 만남을 기다리는 약속 전의 설렘을 충분히 만끽할 수도 있으니까요.
약속 당일에는 기다리는 시간을 즐겨요. 상대가 늦으면 설레더라고요. 관계의 핵심은 인내가 아닐까 싶어요. 인내는 긴장을 유발하는 과정이라서, 편안하진 않아요. 1시간 30분을 넘기면 기분이 망가지더라고요. 심각한 지각은 회피형 공격으로 대응해요. 화가 안 났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거나…
아무래도 지나친 회피는 비겁해요.
언제 한 번 밥 먹어요
⏳ 모래시계
밥 먹자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편이에요. 하지도 않을 약속은 약속이 아니니까요. 빈말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해요. 약속이 가져다주는 무게감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에요.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하죠. 너무 지켜서 간혹 유연함이 없어 보일 때도 있어요. 어쩌면 이건 책임감보다, 구속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단순하고 융통성 없는 제 직관에 변화가 생긴 건 대학교 때의 일이에요. 헤어지면서 밥 먹자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연락을 기다리기만 한 적이 있었거든요. 사실 그 사람이 저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저 먼저 연락을 건네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군대에 가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밥 먹자는 말이 의례적인 말이라는 걸 몸소 체감했어요. 말을 건넬 때의 순간은 진심이었을지라도 좀처럼 만남을 조율하기도 어렵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의례적인 말로 굳어진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들었죠.
저는 사랑과 약속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언제 한 번 대학교 선배와 왕가위 영화에 나오는 양조위와 장국영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당연히 양조위를 꼽았죠. <화양연화>에서 나오는 성숙하고 절제된 사랑의 모습이 제가 추구하는 모습과 일맥상통하거든요.
하지만 선배는 <아비정전>의 장국영을 꼽았어요. 사랑은 이끌리는 것이고, 이끌림의 감정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모습이 가장 사랑다운 모습이라는 것이었죠. 오래 전의 대화인지라 정확한 요점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강 이런 결이었어요.
사실 저는 처음 <아비정전>을 봤을 때, 주인공 아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발 없는 새"임을 자처하는 맥락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연인을 버리고 무작정 떠날 필요는 없죠. 겉으로만 보면 일종의 회피형 애착이라고 할까요.
물론 나이가 조금 들면서 아비를 보고 '저런 부류의 사람도 있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영화 외적인 맥락(홍콩 반환이나 세기말적 분위기)을 톺아본다면 충분히 영화의 의도를 이해하고도 남아요.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죠. 저는 천성이 양조위에 가까운 사람인 걸요. 어쨌거나 저는 사랑과 약속을 동일시하며 살아갈 운명인 겁니다. 그래서 밥 먹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요. 만약 제가 밥 먹자는 말을 건넸다면, 그 사람은 저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인거나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밥 한번 먹자, 라는 말에는 꽤 무거운 철학이 담겨 있어요. 설령 그 말이 의례적인 표현이더라도, 식구(食口)라고 여긴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왕 밥 한번 먹자고 말했다면, 정말로 밥 한번 먹자고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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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한 마디
👒 밀짚모자: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중간고사 치른 과목이 많아요. 의외로 답안지를 쓰기 힘들더라고요. F도 걱정되고요. GPA는 신경쓰지 않지만, 전공 수업에서 낙제를 받으면 졸업 학점을 못 채우거든요. 사실 몇 주 전까지 저는 자퇴를 고려했어요. 제 진로에 학위가 필요한 것 같지 않았고, 학력 차별 사회의 기득권에 편승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거든요. 지금은 졸업이 목표예요. 제 실력으로 졸업을 해도 되나 싶긴 하네요. 여러모로 ‘정신줄’을 놓고 보내는 일상이네요.
⏳ 모래시계: 시험이 코앞인데 나른한 주말 오후에 공부는커녕 음악을 틀어놓고 낮잠이나 잤어요. 흐린 날씨 덕에 방 안은 어둑하고 빗소리도 들리니 괜스레 9와 숫자들의 <Farewell Addict>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다음 곡으로 재생되더라고요. 스포티파이가 제 마음이라도 몰래 읽은 걸까요?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노래를 끝까지 듣고 일어나 정신을 차린 다음, 시험공부를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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