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 번째 편지] "식사에 임하는 태도에 관하여"

2025.04.12 | 조회 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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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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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4월 첫 번째 편지의 서문을 맡은 모래시계입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어요. 오랜만에 나들이하러 갔는데 목련꽃이 만개했더라고요. 목련잎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봄을 만끽했네요.

나들이 점심은 한식집이었는데요,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묵은지 볶음밥을 먹었어요. 여기에 우엉조림과 마늘종, 참나물을 곁들였네요. 저는 한식당이 저렴한 백반집이거나 아예 고급스러운 한정식으로 양극화된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기에 정말 반가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편지 주제는 '식사에 임하는 태도에 관하여'입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고자 한다면 식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엿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다고 '음식 남기지 마라', '음식으로 장난치는 거 아니다' 식의 뻔한 말을 잘 듣는지를 보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말 그대로 식사에 관한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좋아하는 요리는 무엇인지, 애용하는 식재료는 무엇인지, 봄이 오면 어떤 음식을 먹는지… 식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초월하니까요. 한 사람의 가치관이 담겨있죠.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영어 속담도 있잖아요.

이번 글을 읽고 '오랜만에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저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어니언 수프, 1kg 햄과의 인연

모래시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는 양파랍니다.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기름을 둘러 구워 먹으면 더 맛있죠.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양파가 주인공이 되는 법은 없어요. 언제까지나 조력자 역할에 머무르죠. 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개성이 강하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본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존재. 제 모습을 보는 기분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양파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니언 수프는 흥미로워요. 마치 조연 전문 배우가 주연을 맡게 됐을 때 받는 기대라고 할까요. '양파 이 녀석,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지난 여행에서 어니언 수프를 두 번 먹었는데요, 모두 프랑스 파리에서 먹었네요. 어니언 수프는 프랑스 요리이기 때문이에요. 현지 음식을 먹는다는 건 여러모로 설레는 일이죠. 음식을 먹는 것에 국경은 없지만 요리에 국경은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몽마르트 언덕 주변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주문한 어니언 수프는 볼품없음 그 자체였어요. 양파는 거의 들어 있지 않고 모차렐라 치즈만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는데, 배가 고팠던 탓에 체념하고 먹어버렸어요. 한국 돈으로 만 원이 살짝 넘는 가격이었는데,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을 고려하면 이것도 '괴식'에 포함될 수 있겠죠.

그런가 하면 음식을 대할 때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셀 수도 없이 들어왔을)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어요. 사건은 오스트리아 빈의 허름한 호스텔 부엌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친구와 저는 푸짐하게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구매한 1kg 햄을 어떻게 처리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숙고 끝에 찾아낸 방법은 부대찌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햄 전체를 넣었다는 거예요. 게다가 가지고 있던 채소는 파프리카뿐이라 요리에 넣기엔 애매했어요. 결국 그날 저녁의 주요리는 부대찌개 양념 국물과 1kg 햄이 전부였죠.

처음에는 맛있게 먹다가 결국 중도 포기 선언을 하고 말았네요. 느끼함을 없애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파프리카를 씻어 아삭아삭 씹어 먹었어요. 이렇게라도 부대찌개를 '처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결국 빨간 국물 사이로 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묵직한 햄들을 버리고 말았어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졌네요.

당혹스러운 저녁이 끝난 뒤, 친구와 저는 1유로짜리 와인을 홀짝 마시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해 토론했어요. 친구는 쇼스타코비치를, 저는 드뷔시를 최고의 클래식 작곡가로 꼽으며 와인잔을 금세 비웠습니다. 친구와 함께 빈에서 보냈던 그날 밤은 괴식으로 시작하여 교양 있는 음악으로 마무리되었네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좀처럼 괴식을 먹지 않아요. 당연한 일이죠. 양파는 언제나 부엌 한편에 구비되어 있고, 음식을 먹어 치워야 한다는 압박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괴식이 생각나요. 혹자는 "때때로 삶의 한 장면은 음악과 함께 기억된다"고 하던데, 음식도 그런가 봅니다.


도전하는 식사

👒 밀짚모자

최근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을 추천받았어요. ‘식사 선택의 권리’에 주목한 사회과학 서적인데요, 계급 문제를 다룬 치열한 연구가 돋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한 명의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흥미진진하게 들었어요.

식사 고민을 한지 오래 됐어요. 편하고 익숙한 식단을 고집하거든요. 특히 아침밥은 십 년도 넘게 똑같아요. 시리얼에 간단히 준비할 수 있는 과일을 더하죠. 바나나나 방울 토마토 같은 친구로요. 엄밀히 따지면 똑같지는 않네요. 하루를 시작하는 음악도 매번 다르고요. 점심이나 저녁엔 동영상이 필요하듯, 아침 식사에선 음악이 중요해요.

유학 시절에는 가지 덮밥, 토마토 파스타, 제육볶음을 반복했어요. 가끔은 라면, 크림 파스타, 김치볶음밥을 특식으로 준비했고요. 외식은 거의 안 해서, 사실상 한국식 식생활을 이어 나갔답니다. 처음엔 다양한 요리를 익혀 생활력을 키우려고 했는데, 막상 현지에선 레시피를 공부하기 귀찮더라고요. 평소 식단이 질리지도 않았고요. 게으름이 영양학을 이겼어요.

그런데 저는 주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를 하도 뿌려서, 매번 윤리적으로 불편해져요. 말만 착하고, 행동은 비겁하거든요. 저렴하지만 생산 구조가 수상한 상품을 선호하거나, 고기를 과하게 많이 먹거나, 긴박한 유통기한을 피해 선입선출의 중간에서 식재료를 꺼내거나… 조금만 노력하면 교정할 수 있지만, 언제나 외면해요. 도덕적 우월감만 챙기는 태도예요.

물론 준수하는 원칙도 있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최대한 줄여요. 강박도 있어서, 친한 친구가 남긴 반찬이면 대신 먹기도 해요. 식당에선 큰 문제가 없지만, 참사는 집에서 발생해요. 특히 일본 생활 막바지가 고통스러웠네요. 평범한 방법으론 남은 조미료를 처리할 수 없었어요. 저는 묘수를 고안했죠. 요리 하나에 온갖 재료를 때려 넣으면 어찌어찌 해낼 수 있겠더라고요. 마요네즈 제육볶음과 고추장 바질 페스토 파스타가 탄생한 배경이에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어요. 출국 일자가 긴박한데 진도가 안 나가서, 도무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괴식을 먹기 시작했어요. 정말 모든 소스를 다 섞었어요. 언젠가부턴 밥 먹는 시간이 두려웠고, 가격만 보고 왕창 구매했던 과거가 원망스러웠어요. 일주일 정도 반복하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환경을 생각한다면 환경에 속한 인간도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반성하며, 버렸죠.

이후 자신을 학대하는 괴식은 피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경험을 했네요. 저는 생토마토를 이용해 수제 토마토소스를 대량 생산했는데, 껍질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대로 첨가했어요. 식감이 공포스럽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재앙은 학교에서 일어났어요. 토마토 파스타를 도시락으로 준비했는데요, 새벽에 일어나기 싫어서 전날 밤에 미리 만들었어요. 14시간이 경과한 파스타는 폐기물처럼 불어 터져 있더라고요. 오기가 생겨서 꾸역꾸역 먹었어요. 7시간에 걸친 세 번의 식사 끝에 승리했지만, 존엄을 상실했네요.

여러분은 이렇게 살지 마세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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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시계: 나른한 주말 아침, 토마토수프를 만들었어요. 외관은 죽에 가까운데, 어쩌면 파스타 소스를 만들어버린 것 같네요.
⏳ 모래시계: 나른한 주말 아침, 토마토수프를 만들었어요. 외관은 죽에 가까운데, 어쩌면 파스타 소스를 만들어버린 것 같네요.
👒 밀짚모자: 도서관 근처 교회 텃밭인데, 바나나도 키우나 봐요!
👒 밀짚모자: 도서관 근처 교회 텃밭인데, 바나나도 키우나 봐요!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동료 밀짚모자의 추천으로 문보영의 『책기둥』 시집을 읽고 있는데요, 재치 있는 내용이 마음에 들어요. 이를테면 신은 원자보다 작은 미생물이며, 너무 작아서 맨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 신은 인간과 연락을 끊기 위해 자신의 세계에 인간 세계의 중력 법칙이 작용할 수 없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을 재밌게 풀어 쓴 것이죠.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신과 연결될 수 없게 되자, 인간은 섭섭해한다고 하네요.

👒 밀짚모자: 언제부턴가 휴대폰에 방해금지모드가 켜졌어요. 잘못 눌러서인데요, 끌 생각은 없어요. 좋더라고요. 저에게 알림을 빠르게 확인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읽씹’은 답장을 강요하는 언설이고, ‘안 읽씹’은 상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쪼잔한 인성을 전제해요. ‘읽씹 vs 안 읽씹’ 논쟁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연락 습관을 성찰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어요. 빠른 대화와 강박적인 대답은 인간을 착취할 뿐이에요. 시간과 힘을 다르게 쓰는 사회를 염원합니다. 그 시간에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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