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시월 첫 번째 편지로 돌아온 모래시계입니다.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야 가을이 찾아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요즘입니다.
이번 편지의 주제는 '잃어버린 조각'입니다. 저는 가을이 찾아오면 괜스레 옛 추억을 자꾸 떠올리곤 합니다.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이 자꾸 들거든요. 기억을 더듬어 제가 걸어온 길을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무얼 잃어버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러분의 잃어버린 조각은 무엇인가요? 이건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한 점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상실의 추억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꽤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지잖아요. 아무쪼록, 이번에도 가볍게 즐겨주세요.
잃어버린 조각, 눅눅한 노트
이제는 옛날 일이지만, 군대에 있을 적에 소설을 쓰려고 밤마다 머리를 굴린 때가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완성했냐고? 완성하지 못했다. 큼지막한 옥스포드 노트 위에 파카 만년필로 꾹꾹 눌러가며 쓴 미완성의 글은 아직 내 책장 아래편에 고이 잠자고 있다. 4년 전, 강원도 산골짜기의 숨결을 잔뜩 머금은 채로.
그 당시 나는 고된 군 생활에 대한 한탄을 나의 둘도 없는 친구와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종의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소설을 완성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완성한 글은 전역하면 교환하여 읽기로 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나는 새벽 근무마다 틈틈이 노트에 상상의 실타래를 펼쳐 나갔다. 주인공의 이름은 '우진'이었다.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의 지명 '무진'에서 따왔다. 그렇게 한여름을 무사히 보냈다.
이윽고 가을이 찾아왔다. 우리 부대는 한미연합사령관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창작욕은 온갖 할 일들로 대체되었다. 소설 속 시간이 멈췄다. 우진은 마침 직장을 떠나려던 찰나였으나,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채 전역했고, 우진은 여전히 삶의 무료함을 느끼며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먼 시간이 흘러, 그때 쓴 소설의 행방을 친구에게 물었다. 이윽고 돌아온 말, "잃어버렸어". 친구는 컴퓨터 메모장에다 소설을 집필한 것이다. 군용으로 개조된 컴퓨터를 뜯어 함께 전역할 수는 없다. 친구의 소설은 0과 1의 디지털 정보로 제 모습을 온전하게 보존한 채,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파일 청소 기간 때 이리저리 분해되었을 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잃어버린 건 단지 글뿐일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옥스포드 노트 속 우진의 행방을 찾아 헤맸다. 전역일을 계산한 흔적과 잠깐이나마 공부했던 영어 단어 목록을 지나 드디어 그를 찾았다. 아직도 여기에 있었구나…
우진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소설의 맨 끝에 몇 문장 정도 추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마저 떠나버리면 그해 가을의 기억이 모조리 상실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진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언젠가 다시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가을이 온전해지는 때에 꼭 만나자. 그리고 노트를 덮었다.
다시, 가을이다. 왠지 모르게 나를 지나쳤던 여러 모양의 가을이 자꾸 뇌리를 스친다. 어떤 가을엔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괜스레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렸고, 또 어떤 가을엔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꿋꿋이 나뭇잎의 변화를 포착하려 애썼다.
미완성의 기억들이 내 주변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 마음 놓고 안착할 수는 없다. 모두 단단하지 못한, 물렁물렁한 것들이니까.
가을은 원래 그런 계절이다, 하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면 차라리 편하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러하다고 말해줘도 듣지 않을 것임을. 쌀쌀한 바람을 있는 그대로 맞아가며 살아갈 것임을. 가을은 내게 그런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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