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시월 두 번째 편지로 돌아온 모래시계입니다.
이번 편지의 주제는 '만약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에서 따온 표현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반드시 현재형으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약하게 된 이상, 삶의 매 순간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지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때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단상이 지금의 저에게 찾아와 말을 건네고 있네요. 이번 편지는 이를 단서 삼아 여행으로 회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에도 가볍게 즐겨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럼, 11월에 만나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올해 초에 친구와 함께 프라하와 빈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제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매일 잠에 들 때마다 유럽의 나날들이 갑작스럽게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럴 적이면, 나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무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서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한다. 잠은 자야 하니까. 그럼에도 나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어쩔 수 없다.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그날 잠은 다 잔 셈이다.
여행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터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방식은 사진이라는 2차원의 시각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겠다.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사진만큼 강력한 정보 형태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이니까 말이다.
종종 우리는 사진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언의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 사진이 아무리 생생하게 여행의 풍경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미처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활용한다. 언어를 활용해 글을 쓰거나 말함으로써 내면에 담긴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언어로도 담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라기보다, 애초에 우리의 감상을 언어로 완벽하게 치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로 'Lost in translation'이라 일컬을 수 있는 이 상황은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말마따나 번역 속에 사라지는 원문의 의미가 길을 잃은 채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그리움은 어떤 형태로든 환원할 수 없는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무기력함 아닐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즉 단방향으로 흐르는 시계열에 대해 속상함을 토로하는 것은 어쩌면 그 사실 자체에 대한 속상함이라기보다 그때의 감정을 제대로 복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속상함 아닐까?
유럽 일주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그때의 순간을 회상하고 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시간순으로 나열되기는커녕,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온갖 새로운 감상을 만들어내며 기억의 무게를 늘려만 간다. 회상의 과정에서 미처 번역되지 못한, 찰나의 이미지로서 부유하고 있는 몇몇 감정이 생겨난다. 나는 결코 이것을 번역할 수 없고, 따라서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가지고 있는 정체불명의 감상.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하루키의 말처럼, 우리의 언어가 그저 언어에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품게 된다. 나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갈 때, 어떠한 의미도 사라지지 않고 온전히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냉소에 수긍하기도 한다. 그저 언어가 우리 사이를 횡단하며 잃어버리는 의미의 상실조차 따뜻하게 안아줄 수밖에 없다.
비로소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아차리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여행 도중에 마주하는 형형색색의 감정만큼이나 다채롭고 깊은 면모를 지니고 있다. 어떤 것들은 찰나의 순간에 깨닫는 반면, 또 어떤 것들은 기나긴 시간에 걸쳐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여행에 이끌리는 이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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