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두 번째 편지] "리즈 시절을 찾아서"

2025.03.22 | 조회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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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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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3월 두 번째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갑작스럽게 춥더니, 3월은 급격하게 따뜻해졌어요. 일교차는 크지만, 사람들 복장이 전반적으로 가벼워졌네요. 조용하던 공원도 붐비기 시작했어요. 슬슬 벚꽃도 피겠네요. 보통은 봄을 맞는 감각을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시큰둥해요. 조용하고 차가우며, 호흡하는 감각이 짜릿한 겨울이 그립네요.

이번 호 주제는 ‘리즈 시절을 찾아서’입니다. 저희는 못 찾았어요. 아무리 ‘추억 보정’을 해도, 과거가 마냥 예쁘진 않더라고요.

경험상 영화를 자주 보는 남성은 우디 앨런 작품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가끔 찾아 보지만, 그다지 몰입하진 못해요. 감독의 배경이 거슬리고, 작품이 비슷비슷해서 짜릿한 쾌감이 없거든요.

우디 앨런을 언급한 이유는 <미드나잇 인 파리> 때문이에요. 주제가 ‘골든 에이지 에러’거든요. 주인공 ‘길’은 1920년대가 가장 아름다운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우연히 1920년대 파리로 리프 해요. 거기서 애드리아나를 만나죠. 그런데 애드리아나는 1890년대야말로 황금기라고 믿어요. 이후 길은 1890년대에 도착하죠. 그렇게 드가와 조우하는데, 그는 르네상스를 칭송해요. 골든 에이지는 맥락적으로 구성된 개념일 뿐이에요.

현재를 찬양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과거를 낭만화하기는 꺼려지네요.


감당할 수 없는 흑역사

👒 밀짚모자

고등학교를 고른 유일한 기준은 ‘아는 사람이 가장 적은 곳’이었어요. 구질구질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음침한 이미지에서 탈피해서, 깔끔하고 지적인데 성실하기까지 한 사람으로 살 생각이었죠. 계획은 실패했어요. 인성은 쉽게 바뀌지 않더라고요. 인간관계 초기화조차 불가능했어요. 동문이 7명이나 있었고, 심지어 한 명과는 3년 동안 내내 붙어 다녔거든요.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과거가 그립진 않아요. 24살 미만의 역사는 삭제하고 싶어요. 한심한 삶을 감당할 수 없거든요. 세계에 민폐를 뿌렸어요. 차마 글로 쓸 수 없는 일화가 잔뜩이에요. 인간이라면 비슷하겠죠. 공부를 거치면 지금까지의 자신을 반성하게 되니까요. ‘그리운 학창 시절’을 상정하는 언설은 의심스러워요.

“감당할 수 없다.”라는 어절을 좋아해요.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묵직한 어감을 주거든요. 저는 한심한 인생을 감당할 수 없어서, 지난 기억을 낭만화하기 싫네요. 옛 추억과 절연하려는 의지는 없어요. 절대 성공할 수 없거든요.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끔찍한 과오는 지금의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죠. 꾸준한 반성이 유일한 해법이에요. 속 편한 탈출구는 없어요. 제 개인 블로그에는 20대 초반에 작성한 글이 많이 남아 있답니다. 대부분 읽을 만한 수준이 아니죠. 최대한 오래 남겨두려고요. 인간의 변화를 드러내는 강력한 증거거든요.

사실 전 아동기의 대부분을 잊었어요. 생생한 장면은 없고, 컴컴한 방에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는 인상 정도가 어렴풋이 남았어요. 실제로 게임 폐인이었어요. 그런데 해당 장면이 뇌에 새겨진 순간인지, 아니면 사후적으로 창작한 이미지인지, 도무지 감이 안 오네요.

관련된 감정은 여전히 생생해요. 예를 들어 윈도우 XP에선 근거 없는 낭만을 느껴요. 초등학생이던 저는 윈도우 7으로의 진보에 놀라면서도, 변화가 쓸쓸했어요. 윈도우 7은 명백하게 깔끔한 인터페이스를 갖춘 운영체제고, XP는 경이로운 속도로 버려졌어요. 최전선에 서기엔 구닥다리고, 레트로를 공략하기엔 앳되거든요. 유행에서 가장 뒤처졌다면, 직전까지 유행했다는 뜻이니까요. 윈도우 XP와 윈도우 7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르죠.

사실 윈도우 비스타라는 징검다리가 존재해요. 비스타의 시작 화면은 ‘환영합니다’고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은유죠. 그런데 우린 XP 이후 윈도우 부팅 메시지를 몰라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됐죠.

사회 운동을 제안합니다. 컴퓨터를 부팅하며 화면을 천천히 읽어 봅시다. 짧은 시간이지만 흑역사를 성찰하면서요. 아주 어렵답니다? 저는 매번 컴퓨터를 켜는 2000년대 후반의 리듬을 상상하게 돼요. 집으로 돌아와 발로 전원 버튼을 누르죠. 형광등은 켜지 않았고, 방구석은 눅눅해요.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네요. 곧 삐 소리가 나요. 구석에 가방을 던지며 화면을 보면, 파란색 배경엔 새로운 시작.

그런데 윈도우 11의 부팅 메시지가 뭐죠?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 모래시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종종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은 아니고, 맥주 한 모금을 들이마시며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다가 “차라리 학생일 때가 좋았다”면서 불현듯 저에게 물어보는 거죠. 이제 너의 걱정과 근심을 말할 차례야,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럴 땐 저도 눈치라는 것이 있어서 “가끔 그립긴 하지”하고 얼버무립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을 담아 말하자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어요. 이건 대략 97퍼센트 정도로 확신합니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말 많지만—말 그대로 정말 많습니다—가장 핵심은 나아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의 인문계 고등학교가 그러하듯, 대학 입시가 언제나 가장 큰 목표였죠. 튀는 건 나쁜 것이고, 가만히 앉아 조용히 공부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진 때였습니다. 저는 그게 좋은 줄 알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약간 속은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복을 마음대로 못 입게 하는 것은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품행을 단정히 해야 한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꼭 불편한 마의를 입고 그 위에 후리스를 입어야 했을까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교복을 입을 때가 그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졸업 이후로 교복이 그리운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습니다. 어쩌면 제 고등학교 교복이 너무 못 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풋풋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그리워지긴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가벼운 사랑은 그때만 할 수 있는 특권이잖아요.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될 무렵에는 사랑에 무언가 자꾸 붙기 마련이죠. 그러다 보면 무게는 무거워지고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둔감해지고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숙한 사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죠. 매일 아침 연락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심을 아는 사랑, 특별한 데이트 대신 소소한 점심을 먹고 이야기로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랑, “사랑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남용하지 않는 사랑. 특히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어른의 사랑이란, 사뭇 무겁고 진지한 터라 가벼운 말 한마디가 아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에 힘겹게 써 내려가야 해요.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먼 북소리』에서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지금을 여행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중요한 건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이 아닐지도 몰라요. 진짜로 중요한 건 우리가 늘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죠. 과거는 과거대로 썩 괜찮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좋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하길 바랍니다.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 천재지변 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밀짚모자: 한국에 오니 매일 공기가 탁해요. 만약 안개라도 끼면, 세계가 종말하는 풍경을 볼 수 있어요. 제 꿈은 인류의 고통 없는 절멸이랍니다.
👒 밀짚모자: 한국에 오니 매일 공기가 탁해요. 만약 안개라도 끼면, 세계가 종말하는 풍경을 볼 수 있어요. 제 꿈은 인류의 고통 없는 절멸이랍니다.
⏳ 모래시계: 노란 햇빛이 아련해 보여 찍은 사진이에요. 누군가에겐 이곳이 삶의 현장이겠죠.
⏳ 모래시계: 노란 햇빛이 아련해 보여 찍은 사진이에요. 누군가에겐 이곳이 삶의 현장이겠죠.

✍️ 오늘의 한 마디

👒 밀짚모자: 마지막 학기가 개강했어요. 학교를 오래 다니며 쌓은 내공을 실감하는 일상이에요. 신속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도서관으로 이동하는 효율적 동선, 친구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등하교하는 일상적 정신 승리, 맨 앞자리에 앉되 문과 가까운 구석을 골라 수업이 끝나면 다른 학생과 엮이지 않고 교실에서 벗어나는 철두철미한 위치 선정… 후배에게 조언할 수 있다면 전수하고 싶은 생존 전략이 잔뜩이에요. 저만 알고 끝내긴 아까워요.공부는 나누면 풍성해지잖아요.

⏳ 모래시계: 요즘 행복은 이불 속에서 찾고 있어요. 아무 약속이 없는 공강일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워요. 적당히 흐린 날씨를 바라보면서 <고독한 미식가>를 보다가 삼십 분 정도 다시 잠들어요. 매우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어요. 아점을 챙겨 먹고 오후부터는 다시 일과 시작이지만, 아무 할 일 없는 오전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하루키는 오전에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했는데 저는 반대인가 봅니다. 아무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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