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3월 첫 번째 편지 인사말을 맡은 모래시계입니다.
이번 편지는 조금 특별한데요. 저희 모두 한국으로 귀국한 뒤, 원고 작성을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특히 동료 밀짚모자는 지난 반년 동안 일본에 머문 터라 이번 편지가 더욱 각별하겠네요.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고 있어요. 저는 봄이 되면 괜스레 화전(花煎)을 먹고 싶어요. 진분홍색 진달래꽃을 얹은 노릇노릇한 전을 떠올리면 저절로 궁금해집니다. 맛보다는 꽃을 먹는다는 의외성이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화전이 아니더라도 꽃을 먹어왔어요. 왜냐하면 버섯의 몸통과 머리 부분은 식물로 치자면 꽃에 해당하거든요.
버섯의 이미지는 그 종류만큼이나 다채로워요. 식재료 관점에서 바라본 버섯, 생태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버섯, 운명론적 관점에서 바라본 버섯… 어쩌면 우리는 버섯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번 편지의 주제는 ‘버섯의 목소리를 들어라’입니다. 버섯에 관한 두 편의 글을 통해 여러분의 버섯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버섯과 운명, 그리고 우리
⏳ 모래시계
버섯,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버섯 특유의 쫄깃한 식감은 그 어떤 식재료로도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가장 좋아하는 버섯 요리는 청경채 버섯볶음인데요. 먼저 청경채를 볶고 숨이 죽으면서 나오는 수분으로 굴소스를 희석한 다음, 표고버섯을 넣어 익히고 마지막으로 전분 가루를 추가하면 짭짤한 반찬 완성! 표고버섯이 없다면 대충 얇게 썬 새송이버섯으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죠.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오믈렛이 나왔어요. 버섯과 소시지를 곁들인 치즈 오믈렛이었는데, 버섯이 유난히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어요. 레토르트 식품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할 말은 딱히 없지만요. 괜스레 먹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아련하게 만드는 버섯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버섯들은 어디서 온 걸까, 버섯 농부는 어떤 마음으로 버섯들을 길러냈을까, 옆 농장에 사는 버섯들은 이연복 셰프가 운영하는 중식당의 식재료로 납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버섯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 버섯들은 기내식이 될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기내식으로 요리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운명, 믿으시나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을 것일 수도 있고요. 하여튼 현대사회에서 운명과 같은 절대적 서사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이제 능력주의 서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한낮 개인이 21세기를 관통하는 헤게모니를 파괴할 수는 없고 또 그럴 마음도 없지만, 모두 엑셀레이터만을 미친 듯이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어쩔 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거대한 진공청소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언가를 계속 흡입하기만 하죠. 찌꺼기는 한곳에 모이다가 쓰레기통으로 향하고요. 그곳엔 성찰과 의미가 들어설 공간이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강력한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곳에서는 브레이크 따위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하죠. 탈출구는 없어요. 우회로도 없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체감한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온갖 뉴스와 SNS로 퍼지는 수많은 밈, 속보라는 제목을 붙인 채 보도되는 기사들. 한 달, 아니 일주일만 지나도 대부분 잊어버릴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연스레 주의를 잃게 돼요.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고, 당장 해야 할 일을 까먹고 말었어요. 그래요, 이게 한국이지요, 좋아하든 싫어하든.
집으로 돌아오고 맞는 첫 주말 아침, 시차 적응 때문에 새벽에 일어난 저는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칸을 열었어요. 우연히 표고버섯이 있더라고요. 배고파서 버섯 튀김을 만들어 먹기로 했어요. 모두가 아직 잠든 여덟 시, 기름 튀는 소리를 내가며 어찌저찌 요리를 완성했는데 튀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탓에 당연히 실패했어요. 튀김옷은 눅눅했고 버섯에 제대로 달라붙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먹었어요. 어쩌면 이것도 버섯의 운명일 수도 있겠죠. 초라한 튀김옷을 입은 채 따뜻해지는 것.
버섯 변천사
👒 밀짚모자
버섯은 역동적인 생물이에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가장 먼저 등장한 생명은 송이버섯이랍니다. 송이버섯은 부엽토가 없는 척박한 땅에 자리잡아, 죽어가는 소나무에 양분을 공급했고, 탄수화물을 취했어요. 둘의 상리공생은 다종다양한 생물을 불러들였어요. 인간까지도요. 제3세계의 다양한 노동자가 모였고, 새로운 공급 사슬이 계발됐죠.
저는 버섯이라는 단어에서 메이플스토리를 떠올리는 세대예요. 초등학생 시절 메이플스토리에 푹 빠졌어요. 당시 아무도 키우지 않던 페이지를 열심히 육성해서 팔라딘까지 키웠어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저 개인보다는, 게임에 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죠. 빅뱅 패치예요. 정말 세계가 다시 시작하는 듯한 충격적인 변화였어요. 저는 체감을 제대로 못 했지만요. UI가 깔끔해졌지만, 여전히 사냥은 끔찍하게 지루하더라고요. 메이플을 오래 했을 뿐, 즐기지는 않았답니다. 정은 잔뜩 쌓았어요. 학교에서 레벨이 가장 높기도 했고요.
당시 저는 버섯을 혐오했어요. 물컹물컹한 식감이 구토를 유발했어요. 도대체 균을 왜 먹나 싶었죠. 그런데 메이플 스토리를 사랑했기에, 주황버섯만은 미워할 수 없었네요. 그림 실력은 엉망이었지만, 모든 교과서에 주황버섯 낙서를 그렸어요. 하도 반복해서 지금도 손이 기억해요. 주황버섯은 다양한 표정이 있는데요, 저는 눈물을 흘리는 얼굴에 끌렸어요.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롤을 시작했고, 주황버섯 애착은 간단히 소멸했네요. 뒤늦게 메이플에 복귀했을 땐 버섯 따위 안중에도 없었고요.
지금은 버섯을 좋아해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음식으로도 선호하죠. 파스타에 들어가는 양송이 버섯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네요.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식성이 변했다기보단, 의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버섯을 동경하게 됐거든요. ‘키노코테이코쿠’(きのこ帝国)라는 일본 밴드를 자주 듣는데요, 한국어로 ‘버섯제국’이란 뜻이에요. 이 글은 앨범 ‘네코토아레르기’(猫とアレルギー)를 들으면서 작성하고 있어요. ‘고양이와 알레르기’라는 뜻이네요. 또, 밤새서 본 애니메이션 <도로헤도로>에는 버섯 마법사가 등장해요. 호감 캐릭터는 아니지만, 버섯을 만드는 능력이 아주 귀여워요. 물론 가장 큰 영향은 사회학 책 『세계 끝의 버섯』에서 받았어요. 신자유주의가 질주한 폐허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버섯을 중심으로 고찰한 서적이에요. 아주 치열하고, 신선하며, 짜릿해요. 서두에서 언급한 이야기도 『세계 끝의 버섯』에 소개된 내용이에요.
어떤 독서 경험은 몸을 급격하게 변화시켜요. 저는 이제 산길을 걸으면 버섯을 찾아 주위를 둘러봐요. 찾으면 운이 좋고, 아니면 말고. 주변에서 버섯 얘기가 나오면, 대뜸 “내가 버섯을 좋아해서”라는 말을 붙이며 끼어들죠.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서로 얽히며 원폭의 국면을 바꿨어요. 예전에는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 두려웠는데, 이제는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버섯이 맺는 복잡하고 다종적인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봐 버렸으니까요.
추구미는 버섯이에요. 일견 못생겼고, 냄새도 고약해요. 하지만 구체적인 환경과 요리법, 혹은 서로에게 익숙한 정도에 따라, 버섯의 풍미는 매력적으로 변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만나기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죠.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돼요. 무언가 창발하죠. 결과는 알 수 없어요. 귀여운 버섯… 여러분도 불확실성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나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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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유럽 일주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며칠 동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어요. 이제 4학년이고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준생이 될 예정인지라, 주인공 산티아고의 꺾이지 않는 의지가 다르게 읽혔네요. 지금은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있는데요, 헤밍웨이 특유의 하드보일드 문체에 푹 빠졌다가, 하루키의 소소한 에세이 문체를 접하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듯해요. 최근 자주 듣는 음악은 김오키의 ‘올오브미’. 재즈는 봄보다는 가을이 어울린다는 생각이지만 이 음악만큼은 논외예요.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느낌?
👒 밀짚모자: 4학년 2학기가 개강했어요. 할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네요. 어학 자격증을 2개 따야 하는데, 졸업논문도 미완성이고, 21학점을 수강해야 돼요. 보고 싶은 영화랑 책도 너무 많고요. 대외활동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못 할 것 같네요. 아르바이트조차 힘들 것 같아요. 과연 친구는 사귈 수 있을까요? 취업 준비는 또 어떡할까요? 머리가 엉망진창이에요. 혼란스러워요. 침착하게 업무를 하나하나 처리하고 싶은데, 일본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아직 여독도 남아 있는 것 같고요. 참고로 졸업 논문 주제는 보지도 않은 <범죄 도시>로 정해서, 몰아 보느라 고생 좀 했네요. 물론 정주행을 마치고선 주제를 변경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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