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11월 하순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저는 가을 꽃놀이에 실패했어요. 11월 10일은 시기상조였네요. 관광 사이트를 과신한 제 잘못이지만, 기후 변화를 증오하려고요. 단풍 시기가 예전과 다르고, 붉은색도 연해진 것 같아요. 인간보다 빠르게 변하는 지구가 낯설어요. 쓸쓸한 기분이네요.
거리에는 ‘자연스럽게’ 낙엽이 쌓여 있어요. 풍성하고 따뜻한 인상이죠. 두 가지 흔적이 보이니까요. 잎은 나무에 걸려 있었고, 떨어진 이후 누군가 치웠어요. 혼자가 아니란 뜻이죠. 세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뿌리는 버섯과 공생하고, 줄기는 새의 터전이죠.
낮을 기다리는 매일이에요. 해가 짧으니까요. 자외선 차단제를 떡칠하던 여름이 그리울 지경이네요. 인간은 식물과 달리 광합성을 못 하지만, 햇빛에서 기운을 얻으니까요. 일교차도 크고요.
이번 호 주제는 ‘인형이 보고 있어’입니다. 저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믿으며 온갖 물건과 상호작용해요.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함께 존재하니까요. 여러분도 비슷할 거예요. ‘인형’을 쉽게 버리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외로운 계절. 동반자를 생각하는 편지가 되길 바라요.
그저 웃고만 있을 뿐
⏳ 모래시계
인형에는 형용할 수 없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어요. 그저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을 닮은 물건에 불과하지만,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고, 선뜻 인사를 건넬 것 같은 인상을 주잖아요. 비록 인형은 말할 수 없지만요.
왜 그럴까요? 가장 큰 이유는 인간과의 유사성이겠죠.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인형은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해요. 곰돌이 인형은 실제 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대신 곰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상의 곰이 그 모습을 차지하죠. 곰돌이 인형에는 실제 곰이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이빨과 발톱이 없는 대신, 동그란 눈과 미소를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형은 귀엽고, 무해해요. 우리는 적어도 인형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일은 없겠습니다. 뭐, 처키는 예외로 하자고요.
사실 저도 인형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해온 아주 작은 곰돌이 인형인데, 지금은 책꽂이 위에 거주하고 있어요. 책꽂이를 지키는 경비요원이라고 할까요. 심심해할까 봐 자동차 모형도 버리지 않고 옆에 올려두었습니다. 모두가 집을 비운 사이에 운전하고 다니라고요.
이토록 신비한 인형에 시간이 응축되고 이야기가 덧씌워지면 더 큰 아우라를 지니게 돼요. 인형과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쌓이니 더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요. 설령 낡고 헤지더라도, 인형을 향한 마음은 오히려 커집니다.
독일의 예술가 카티아 켐니츠(Katja Kemnitz)는 “낡은 인형에는 많은 영혼이 담겨 있다”고 말하며 “Too Much Love”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요. 두 개의 똑같은 인형을 담되, 새 인형과 낡은 인형을 대조해서 보여줘요. 켐니츠는 그녀의 딸이 항상 데리고 다녔던 강아지 인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죠. 딸은 새로운 인형을 선물로 받아도 거부하고 오래된 인형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고 해요.
아이가 잠에 들기 전 침대 위에 우두커니 놓인 인형에게 오늘 겪었던 일을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와요. 그중에는 분명 말 못 할 이야기도 있을 거예요. 엄마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비밀 같은 것이죠.
아이는 인형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요. 인형은 그저 듣고 있을 뿐이니까요. 아이가 인형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판단도, 평가도 없어요. 오직 순수한 고백과 경청만이 존재할 따름이에요.
자기 PR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귀’보다 ‘입’에 집중하고 있어요. 듣는 능력보다 말하는 능력이 더 값진 세상이죠. 여기저기서 자신을 뽐내고 있어요. SNS 시대에서 ‘주목’은 곧 ‘돈’으로 직결되니까요.
한편으로는 바깥세상의 소리를 차단하는 노이즈 캔슬링도 탄생했어요. 분주히 움직이는 세상의 소리는 더 이상 정겹지 않죠.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타협과 심해지는 의견의 양극화… 어쩌면 노이즈 캔슬링은 편의 기능이 아니라 필수 기능이에요. 제 동료인 밀짚모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생존전략”인 셈이네요.
인형은 무슨 심정일까요. 책꽂이 경비요원 곰돌이에게 묻고 싶은 마음이지만, 곰돌이는 늘 그랬듯이 말이 없네요.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에요.
혼자가 아니야
👒 밀짚모자
제 본가에는 큰 인형이 많아요. 한 침대에서 동침하죠. 꿀벌, 딱정벌레, 고래, 상어, 치즈로 구성된 대가족이에요. 사람 모양이 아니라 호칭이 거슬리네요. 얘네를 인형(人形)이라 칭하면 인권침해, 혹은 개체의 특성을 뭉개는 과잉 투사일까요? 인류는 하나의 범주에 불과해요. 특권을 부여해선 안 되죠. 다른 종도 엄연한 행위자예요. 개성을 존중해야죠. 꿀벌은 꿀벌형이고, 상어는 상어형이에요.
비인간 솜털 모형은 소중한 친구예요. 정도 많이 쌓였죠. 아저씨가 되어도 작별하지 않으려고요. 일견 ‘유아퇴행’이지만, 당대가 요구하는 가치관이에요.
미국 부통령 당선인 밴스는 ‘캣 레이디’를 언급했어요. 저는 망언을 경멸했지만, ‘캣 레이디’에 이입하진 않았네요. 일단 남성이고, 반려동물과 관계를 맺을 의지도 없어요. 혼자가 편해요. 다른 생명과 일상을 공유할 용기가 부족하거든요. 일방적으로 대접받거나 떠받들면 쓸쓸하고요. 서로를 돌보는 대등하고 쿨한 태도를 원하는데, 엄두가 안 나네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미사토 소령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인연에 익숙해져야 어른’이라고 주장해요. 저는 중고등학생 때 TVA를 네 번이나 돌려봤지만, 아직도 ‘어린이’네요. ‘어른’과 ‘어린이’의 대비가 불편한가요? 교조적인 연령주의는 아니에요. 에바 시리즈는 ‘어른’의 불가능성에 파고들며 다른 길을 찾는 과정이니까요.
외롭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고, 돌봄은 생존의 조건이에요. 상대가 꼭 생명이어야 할까요? 마음을 열면 미약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요. 저는 책과 함께 살아요. 방의 일부를 점유하는 동반자라고 느끼죠. 텍스트는 책장에 머무르지 않아요. 모든 구절은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끊임없이 진화하죠. 글은 몸에 새겨지고, 우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 해요. 그러니 애정을 담아야죠. 사랑하는 구절을 휴대전화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예요. 하루에 수십 번씩 읽을 수 있어요.
영화 포스터도 훌륭해요. 멋진 장면을 담은 우울한 작품이면 더 좋고요. 인간은 이기적이고 잔인해서 타인의 고통에서 위로받으니까요. ‘그래도 쟤보단 낫네’, ‘쟤도 나처럼 아프네’, ‘원래 인생은 고통이니까’… 구체적인 심리는 극단적으로 비일관적이죠. 정식화할 필요도 없고요. 예술을 즐기는 이유니까요. 내면의 모순과 불일치는 영원한 주제예요. 언어화할 수 없는 상처, 닿지 않는 공감, 원인불명의 답답함. 제가 환장하는 분위기예요.
‘홈시어터’가 아무리 발전해도, 영화관은 절대 몰락하지 않아요. 극장이 주는 위로는 대체 불가능하거든요. 어둡고 조용한 상영관에는 낯선 존재가 함께하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요. 영사기가 돌아가면 스크린의 밀도에 휩쓸리고, 시공간이 굴절해요. 시간을 보내는 방법 자체가 달라지죠. 암전된 실내는 새로운 우주예요. 배속, 10초 건너뛰기, 프리미엄 정기 구독, 멀티테스킹, 노이즈캔슬링은 통하지 않아요.
우리는 영화에, 영화는 우리에게 다가오죠. 삶이 조우하니 무한한 감상이 생겨나고요. 정답(正答)이면 몰라도, 정답(定答)은 없어요. 상영이 끝나면 불이 켜지고, 여운을 곱씹으며 퇴장하죠. 관객의 두뇌는 비평 투쟁으로 ‘풀가동’해요. 극장을 나가는 엘리베이터가 압도적으로 두근거리는 이유예요. 근거 없는 친밀감으로 대화를 열고 싶으면서도, 타인의 세계와 거리감을 존중하잖아요. 차이는 아름다워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 천재지변 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저는 이번 겨울에 유럽 일주를 떠날 계획이에요. 마침 체코로 교환학생을 가는 친구가 있어서 만나기로 했어요. 프라하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고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빈을 여행한 다음, 친구는 다시 프라하로, 저는 로마로 떠나기로 했죠. 그런데 갑자기 교환학생을 포기했다고 하네요. “취준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어떡하죠. 런던행 비행기표는 이미 끊었고 유럽 일주 계획은 아직 다 완성하지 못했어요. 이 와중에 시간은 야속하게 멈추지 않고 흘러가네요. 어쨌거나 겨울은 다가오고 있어요. 혼자만의 겨울은 어떨지 두려우면서 설레요.
👒 밀짚모자: 저는 일본 교환학생이지만 일본어를 못하는데요, 요샌 비교문학 세미나로 낑낑대고 있어요. 미리 읽을 자료가 많거든요. 곧 아리요시 사와코의 『비색』 (非色)을 다루는데, 1963년 소설이라 표현과 한자가 낯설어요. 내용도 무시무시하고요. 전후 재일미군 주둔, ‘전쟁신부’, 슬럼가 여성 사이의 관계, 백인 내부의 차이 등 맥락이 두터워요. 열심히 읽어도 한 시간에 15페이지가 고작이네요. 총 28시간 정도 쓴 것 같아요. 느린 속도가 곱씹는 독해로 이어진다 믿으며 이겨냈죠.
📬 토요일 우편함은 여러분이 궁금해요. 댓글로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토요일 우편함을 더 풍성하게 채워줄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