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6월 첫 번째 편지의 인사말을 맡은 모래시계입니다.
사진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압도적으로 높은 신뢰도를 기반으로 프레임 속에 무얼 위치시킬지 결정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죠.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사진의 권능에 대해 의심해 보게 됩니다. 보정은 일상화되었고, 심하면 맥락과 사실을 훼손하는 조작이 이루어지죠. 19세기 미술이 겪었던 변화를 21세기의 사진이 그대로 겪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번 편지의 주제는 '우리 모두 사진첩을 꺼내 보아요'입니다.
우리가 찍은 사진은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고, 한쪽에선 AI를 이용한 이미지가 생성되고 있습니다.
사진의 힘이 약해져 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무얼 준비해야 할까요? 언제나 그렇듯,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죠. 차분히 편지를 읽은 다음, 각자만의 사진첩을 확인해 보시죠.
영혼을 지켜라
👒 밀짚모자
저는 하찮은 사회 운동에 집착해요. 오늘은 ‘사진 안 찍기’를 소개해 드리려고요. 당대는 사진이 너무 많아요. 무서운 현상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라는 도시 전설을 잊었어요.
렌즈로 포착한 이미지 파일과 몸으로 느끼는 세상은 달라요. 모든 스마트폰 카메라는 왜곡을 강제해요. ‘노필터’는 ‘기본 보정’이에요. 누구나 쉽게 촬영하고, 가공하며, 과시하는 세태예요. 예리한 자료는 얼마 없어요. 대부분은 쓰레기죠. ‘두 번 탭해서 좋아요.’를 보내기조차 꺼려지잖아요.
연초에 인스타그램을 그만뒀어요. 영혼의 가출을 자랑하는 공간이거든요. 상상만으로 오싹해져요. 예전에 저는 ‘진짜 좋은 거에만 좋아요를 눌러야지.’라는 소신이 있었어요. 괴로운 결단의 연속이에요. 제 하찮은 일상에 좋아요를 눌러 준 상대에게 보답할 수가 없거든요. 언젠가부턴 누구도 저에게 좋아요를 누르지 않게 되더라고요. SNS는 품앗이가 기본이니까요.
주위에 촬영과 편집을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저는 그들의 작업도 경계해요. 실력을 쌓으려고 지난한 연습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메모리 카드에는 감당할 수 없는 용량의 푸티지가 쌓여 있겠죠. 무게를 상상하면 섬뜩해져요. 영혼을 대량으로 납치하는 고스트 헌터잖아요.
예전에 친구 한 명은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주인공 스미레가 묘사되는 대목을 저에게 공유했어요. 저랑 닮았다면서요. 세상 물정 모르고, 세상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며, 옛날 이탈리에 영화에 나오는 전쟁고아처럼 삐쩍 마른, ‘사진 찍기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서술이더라고요. 저는 경악했어요. 그런 스미레를, 굳이 사진으로 찍어서, ‘스미레와 비슷한’ 저에게 공유했잖아요. 괴롭히려는 의도가 명확해요.
갤러리 앱을 열었는데 스크롤이 얇으면 섬뜩해져요. ‘사진 정리’는 오랫동안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목표예요. 큰마음 먹고 도전해도, 친구와 함께 갔던 여행의 결과물을 만나면, 순식간에 꺾여요. 비슷한 구도가 대부분이라 피곤한데, 심지어 영상까지 섞여 있어요. 함부로 지우기도 미안하고요. 일단 뽑아낸 영혼이라면, 성실하게 대응해야 해요. 제 전술은 도망이에요. 죽이기 싫어서 방치하는 비겁한 태도죠. 휴대전화를 바꾸기 전까지 사진 정리를 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휴대폰도 고장나기 전까지 쓸 거고요.
다들 비슷한 곤경에 처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최악은 클라우드예요. 이 구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죠. 스마트폰 사진 가치관을 미리 정립해 놔야 하는 이유예요. 저는 ‘최소 제작, 최대 정리, 극소 클라우드’예요. 두 개는 이미 글렀지만, 클라우드는 비활성화했네요. 제가 모르는 시스템에 저장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적으로는 저항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누구와 싸우며 무엇에 저항하는지 잘 모르지만, 결투를 도무지 멈출 수가 없네요. 이게 옳거든요. 저항에는 오만가지 방법이 있어요. 세계는 안 좋은 방향으로 질주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살길을 찾을 수 있어요. 순간을 직시하려면, 카메라를 놓고 신체에 집중해야 해요.
사라져가는 그 모든 것을 향하여
⏳ 모래시계
제 사진 보관함에는 유독 풍경 사진이 많아요. 그만큼 풍경 사진은 나름 잘 찍지만, 인물 사진으로 넘어간다면 도무지 할 말이 없네요. 이른바 '여자 친구 인생샷' 부문에서 저는 빵점을 받을 거예요. 제 천성 자체가 산속으로 들어가 무위도식할 운명인가 싶기도 합니다.
여러분 모두 한 번쯤은 사진을 정리해 보신 적이 있겠죠. 사진 정리의 묘미는 무얼 지울지에 달려 있지 않아요. 그보단 무얼 살려 둘지가 중요해요. 어떤 사진이 휴지통에 들어갈지 판단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요. 흔들린 사진이나 초점이 엇나간 사진이 될 수 있죠. 정기적으로 사진을 정리하는 사람은 어떤 사진을 남길 것인지 고민해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다르죠.
제가 딱 그런 사람이에요. 시의성을 잃은 스크린샷은 무자비하게 지워버리고, 중복되는 사진은 무조건 한 장만 남겨요.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추억을 톺아보며 사진을 정리하는 일이에요. 과잉 정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지혜라고 할까요. 적어도 제가 생산한 정보는 체계적으로 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토요일 우편함을 꾸준히 읽어 오신 분이라면, 제가 이번 겨울에 유럽 일주를 다녀왔다는 사실도 아시겠죠. 방대한 양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왔는데요, 제 모습답지 않게 정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워낙 많다 보니 찬찬히 음미하면서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계속 미루고 있네요.
결국 유럽 일주에서 찍은 6,000여 장의 사진들은 고스란히 방치되고 있어요. 그때의 추억을 회상할 적이면 밤마다 숙소에서 적은 토막글을 읽지, 굳이 외장하드를 꺼내어 사진을 찾아보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보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끔일 뿐이에요. 앞뒤 맥락이 제거된 사진보다 감정이 고스란히 기록된 텍스트가 차라리 낫죠.
디지털 세계에서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요. 삶의 흔적은 0과 1로 치환됩니다. 일상의 질감은 평탄해지고, 고유의 물성은 제거되어 저장되기 쉽도록 변형되죠. 깊이는 얕아지고, 넓이는 좁아져요. 담고 있는 의미는 일차원의 영역으로 퇴행하고요. 그건 온전한 의미의 기록은 아닐 거예요.
심지어 우리는 더 이상 기록을 소유하지도 않아요. 클라우드가 대신 해주니까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기록을 내려받을 수 있어요. 이제 AI가 등장했으니, 지식도 스트리밍하듯이 소비하는 시대가 찾아올 거예요. 우리가 가진 건 없어요. 미디어는 감각 기관의 연장이며, AI는 두뇌의 연장이에요. 생각조차 대행을 맡길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록의 시작은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애틋함에서 비롯한 것이겠죠.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또 다른 유한한 존재의 소멸을 안타까워하고 이를 무한하게 남기고자 했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해서는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해요. 건강한 이별만이 건강한 출발을 기약할 수 있는 것처럼요.
기록 대신 기억하는 건 어떨까요. 비인간적인 완전무결함보다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끌어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삶은 훨씬 다채롭고, 숨겨진 의미로 가득하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카메라부터 켜는 제 습관에 대해서는 무어라 할 말이 없군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 천재지변 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한 마디
👒 밀짚모자: 마지막 학기 목표는 ‘친구 한 명 사귀기’였는데요, 실패했어요. 노력은 했어요. 모든 수업에 다 나갔거든요. 아무래도 ‘재능’이 모자란가 봐요. 주말에 외로움을 달래려고 아오바 이치코 전집을 들었어요. 이번에는 『うたびこ』가 제일 좋았네요. 클래식 기타에서 손이 움직이는 기척이 매력적이었어요. 저는 기척이라는 단어를 흠모해요. 무해한 변태 같은 인상을 주거든요. 활자 모양 그대로 구현돼서 골목을 활보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아요. 기척이 돌아다니는 세계는 귀엽고 아름다워요.
⏳ 모래시계: 최근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동료 밀짚모자의 능수능란한 일본어 실력이 부럽더라고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죠. 언어의 확장은 곧 사유의 확장이에요. 일본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수 있다는 건 언어 너머의 맥락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가 하면, 영어 공부를 명분으로 <프렌즈>를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우연히 벤 모리슨의 노래 'Tupelo Honey'가 가장 낭만적이라는 장면을 봤는데, 찾아서 들어보니 수긍하게 되더라고요.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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