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두 번째 편지] "홍대병이 온다"

2025.05.24 | 조회 321 |
0
|
토요일 우편함의 프로필 이미지

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첨부 이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5월 두 번째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날씨가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대학은 축제철을 통과했어요. 인류학적으로나 한국 근현대사로나, 대학 축제는 흥미로운 텍스트예요. 저는 기가 빨려서 싫어하지만요. 연예인에도 관심이 없고요. ‘공부나 하지 뭐 저런 걸 하나’ 싶어요. 학술적인 쾌락이 더 크지 않나요?

제가 다니는 인하대학교에는 마지막 금요일 밤에 비가 내렸네요. 금요일이 불타다 말았어요. 오랜만에 교내가 조용해져서 기분이 좋았는데요, 들떠 있다가 식어버린 학생들이 실내에서 당황하고 있더라고요. 마음이 아프고, 유감스러웠어요. 다행히 제가 귀가한 이후엔 행사를 재개했다고 하네요.

이번 호 주제는 ‘홍대병이 온다’입니다. 세상에 힙스터가 많아지면서, 저희처럼 ‘힙력’이 낮은 사람은 위기에 처했어요. 생존 전략을 고민하는 과정을 담았답니다.


모두가 힙스터

모래시계

취미는 고상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취미의 첫걸음으로서 어느 정도의 허영심은 필요하죠. 독서의 원동력이 오로지 텍스트의 매력으로부터 발생하는 걸까요? '텍스트힙'은 분명 괄목할 만한 유행이지만, 독서라는 행위를 온전히 끌어안기엔 호소력이 부족해요. 모든 취미에는 어쩔 수 없이 문화자본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있어요.

허영심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저도 허영심으로 제대로 된 독서를 시작했으니까요. 군대 선임의 관물대에 가지런히 놓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처음으로 '책을 읽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네요. 책이 재밌어 보여서가 아니었어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손에 든 교양 있는 모습을 원한 거죠.

처음 고른 세계문학전집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는데요, 생각보다 괜찮아서(?) 그 유명한 『인간실격』을 읽었어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조금 실망스럽더라고요. 그래도 이미 사놓은 게 있으니,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집어들었어요. 나흘 만에 독파했고, 생애 처음으로 글에 진심으로 몰입한 경험을 얻었어요. 그 이후로 하루키의 팬이 되었죠.

힙스터 단계론을 아시나요? 래퍼 김심야에 의하면, 1단계는 주류 문화에 편승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요. 2단계는 주류 문화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단계죠. 마지막 3단계에 가서는, 주류 문화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굳이 3단계로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요?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테고, 이러한 행태는 무한히 반복될 거예요.

그러므로 힙스터 개념은 공허해요. 너무 상대적이라서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없고요. 우린 모두 누군가에게는 힙스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론의 기반부터가 공허하다면, 그 담론을 거부하는 게 최선이죠. 그러기 위해선 본질에 집중해야 해요. 내가 기꺼이 시간을 들여 즐기고 싶은 것. 그리고 그것을 힘껏 즐기는 것. 그 과정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하면 더 좋고요. 취미의 지향점을 더욱 확실하게 정할 수 있으니까요.

독서에 발을 디뎠다면, 좋아하는 작가를 찾고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독파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음악이나 영화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죠. 이른바 '몰입'으로 남들의 시선을 차단할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는 거예요. 남들의 시선을 차단하면 역설적으로 본질이 뚜렷하게 보여요. 맥락이 걷힌 날 것 그대로의 취미를 즐길 수 있죠. 순수한 행복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취미는 취미로만 머물러 있기엔 너무 소중한 존재예요. 이왕 하는 거,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고요. 힙스터니, 뭐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요.


도플갱어가 마주치면 한 명이 죽는다던대

👒 밀짚모자

『하품의 언덕』은 해제가 감동적이에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오만 가지 중에서 대표적인 건 두 가지다.

1. 책을 사랑하는 사람

2. 책

저는 이 대목에서 낄낄 웃으며 공감했어요. 단어의 밀도가 높아요. 3번은 생략됐지만, 아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해 준 책” 아닐까 싶네요. 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서, 친구 생일에는 웬만해선 책을 선물한답니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크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에서 고르죠.

저는 취향이 까탈스럽고, 관용이 없어요. 욕심은 많아요. 몸에 안 맞는 작품도 일단 섭취해요.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죠. 조용하고 우아하게 아픈 정서를 가장 좋아하지만, 마동석이 몽땅 때려잡는 범죄 시리즈도 즐겁게 감상해요. 크래딧까지 끝까지 완주해요. 그리고 망언을 퍼붓죠. “어떻게 이딴 영화가…” 통념과 달리, 잡식성은 편협하답니다.

구체적인 선호는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저는 장르보다는 감상으로 작품을 분류해요. 세세하게 나눌 수 있답니다. 차분하거나, 치열하거나, 다정하거나, 지적이거나, 후련하거나, 찌질하거나, 난해하거나, 요란하거나… 이렇게 나누면 남들과 접점이 줄어들어서 유용해요. 예를 들어 “나는 로드무비가 좋더라!”에 “로드무비는 잘 몰라서…”라고 답할 수 있죠.

예전엔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갈망했어요. 덕질을 공유하며 종일 떠들고 싶었거든요. 순진한 생각이었죠. 닮은 사람과 실제로 만나면, 대화가 싱거울 때가 많아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티키타카’를 반복하면, 상대방이 궁금하다기보단 자신의 독창성만 뽐내고 싶어져요. 절대 성공하지 못하죠. 둘은 유사하게 사고하거든요. 그러면 조급해져요. 같잖은 소리가 잦아지고, 따분해지죠.

그렇게 망친 관계가 한 트럭이지만, 저는 여전히 동족을 찾고 싶었어요. 성찰이 안 됐네요. 선입견을 바꾸긴 힘들어요. 그러다 문보영의 픽션 일기와 만났어요.

“몇 달 전에는 무도수가 꿈에 나왔다. 무도수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애를 좋아했던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시를 읽지 않는데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시를 쓰는데 대화가 통하는 사람보다 강렬했다.”(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사실 저는 저와 닮은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어요. 친구들은 제 동족 혐오가 유난스럽다고 주장해요. 저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믿어요. 나는 왜 나 같은 사람과 대화에 실패하는가? 같은 단점을 공유할까 두려웠고, 서로의 추악함을 알아챌까 봐 도망쳤기 때문이에요. 회피형 성격을 발견했고, 이제는 비교적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됐어요.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집중하며 서로의 어긋남을 즐기고, 상대방을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유기체로 인식하며, 관계의 양상에 균열을 낼 수 있죠.

저는 여전히 성급하고 오만하며 재수가 없지만, 이제 도플갱어는 두렵지 않아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 천재지변 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모래시계: 식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차이가 커요. 멀리서 보면 그럭저럭 잘 자라는구나 싶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치열한 생존의 흔적이 보여요.
⏳ 모래시계: 식물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차이가 커요. 멀리서 보면 그럭저럭 잘 자라는구나 싶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치열한 생존의 흔적이 보여요.
👒 밀짚모자: 비둘기가 침입했어요. 제가 움직이면 놀랠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요, 재미가 없는지 잠깐 놀다 가더라고요. 
👒 밀짚모자: 비둘기가 침입했어요. 제가 움직이면 놀랠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요, 재미가 없는지 잠깐 놀다 가더라고요. 

✍️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대학교 캠퍼스 곳곳에 민들레와 이름 모를 꽃이 만개했길래, 구글링 좀 해봤어요. 데이지 같이 생겼는데 막상 데이지는 아니더라고요. '봄망초'라고 하네요. 구한말 때 들어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망초'(亡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 사연을 듣고 봄망초에게 조금 미안했어요. 식물은 죄가 없잖아요.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갖는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우리의 사고는 언어가 지배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니까요.

👒 밀짚모자: <조용한 열정>이 좋았어요. 에밀리 디킨슨 전기 영화인데요, 모든 대사가 우아해요. 영어를 못 알아들어도, 아름답게 울려요. 배우의 음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저에겐 712번 시가 특히 인상적이었네요. “나는 죽음을 기다릴 수 없기에 / 죽음이 친절하게 나를 기다려 줬다. / 마차가 태웠다. 오직 우리만을 / 그리고 불멸을.”(Because I could not stop for death–He kindly stopped for me–The Carrige held but just Ourselves–And immortality) 밀도가 무시무시하죠?


📬 토요일 우편함은 여러분이 궁금해요. 댓글로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 토요일 우편함을 더 풍성하게 채워줄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토요일 우편함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