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두 번째 편지] "여행의 방법을 찾아서"

2025.02.22 | 조회 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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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편함

잠깐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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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2월 두 번째 편지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지난 설날에 해외여행 수요가 폭증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연휴가 워낙 길어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긴 듯해요. 국내 여행을 외면하는 세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이번 호 주제는 ‘여행의 방법을 찾아서’입니다. 우연의 일치로, 저희는 한국 설날을 해외에서 보냈어요. 각자 긴 여행을 하고 있었거든요. 해외여행 과잉을 빈정댈 처지가 아니죠. 꼭 나쁘지만도 않고요. 다만 국내 여행을 지나치게 냉소하면 안 되겠죠. 제주, 부산, 목포, 서울, … 멋진 지역이 많잖아요.

슬슬 귀국일이 다가오는데, 감상을 나누면 무언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 편지는 일본과 유럽에서 쓰였고, 도착할 즈음엔 우리 모두 한국에 있어요. 다양한 장소가 겹쳐서, ‘글로벌 사회’스럽다는 인상이 있네요.

물론 저자와 독자의 입장은 다르죠. 저는 웬만한 여행 에세이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집어 들어요. 부럽고, 질투 나니까요. 결과는 비슷해요. 좋은 글을 읽으면, 잘 써서 열받아요. 형편없는 글이라면, 한심해서 분개하죠.

글과 감상이 어떻게 만날지 궁금하네요.


냉소병 환자 여행 비법

👒 밀짚모자

저는 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을 경계하고, 질투해요. 편하게 여유를 즐기는 중산층일 확률이 높거든요. 밥상머리에서 쌓아온 교양, 곳곳을 돌아다니는 적응력, 그로 인한 지나친 자신감과 둔감함. 견문은 단순히 넓어지진 않아요. 어설프게 다양하면, 성실하게 편협한 시선보다 얕아요.

오버 투어리즘은 한국에서 보면 배부른 투정이지만, 지역 주민에게는 심각한 공해예요. 관광은 가볍잖아요. 적당히 명소를 찾고, 훑고,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고, 그대로 지나가죠. 결과적으로 소음과 쓰레기를 대량으로 남기고요. 인터넷에 게시된 인증 사진은 또 다른 과잉 정보인데, 과잉은 다시 과잉을 유도하기에, 명소엔 인간이 몰려요.

반년 동안 일본에서 유학하며 관광을 자주 다녔어요. 몇 가지 행동 강령이 생기더라고요. 가장 철저하게 지킨 법칙은 ‘리뷰에서 백인 남성이 웃으며 따봉을 치켜세우는 사진을 발견하면, 절대 가지 말 것’이에요. 세계적으로 붐비는 분위기가 고통스럽고, 생각을 비운 듯한 관광객과 동류로 여겨지기 싫었거든요. 물론 한국인도 요리조리 피해 다녔죠. 저랑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존재와 마주치기 두려웠어요. 잠깐 들린 방문자들이 나눌 만한 얘기가, 해외에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들리면, 시시했거든요. 남들도 저를 비슷하게 넘겨짚겠죠.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아요.

현재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고, 어딜 가도 생각이 엉망진창이에요. 그래도 난장판을 버틸 수 있는 필살기가 있어요. 저는 되도록 여행지에서 SNS를 켜지 않아요. 이메일이나 카카오톡도 안 열죠.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낯선 환경에서 다른 정보를 찾아 빠르게 적응하는 상태변화이지, 기존의 관계에 집착해 지금을 망치는 과시욕이 아니니까요. 멋진 체험을 했다면, 당장의 몸에 집중하면 충분해요. 정확히는, 그러기도 벅차죠. 지금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느끼는지를 확인하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니까요.

쉬는 시간이 중요한 이유예요. 멍하니 있으면, 감상이 알아서 정리돼요. 시각이 진화하는 순간이죠. 저는 일정의 막바지에 오랫동안 걷거나, 카페에서 쉬는 시간을 웬만하면 확보해요. 이어폰 따위 끼지 않죠. 주위에서 들어오는 뻔한 소리를 통과해야 하니까요. 반면 대중교통에서 릴스를 넘기면 피로만 쌓이죠. 실시간으로 연락을 나누면, 한국성을 과시하는 느낌이라 따분하며 부담스럽고요.

누구나 나름의 여행 스타일을 가지고 있죠. 일행과 취향이 다르면 고통스럽지만, 차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에요. 적당히 아름다운 장소에서 가벼운 얘기가 통하면, 웬만한 갈등은 사소해지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혼자 돌아다니기를 선호하지만,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하면 대부분 즐거웠어요. 물론 관광지보다 곁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는 상황이 많아지지만, 여행은 낯선 환경과의 조우고, 우리는 친한 사람조차 잘 몰라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관점에선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경험은 아주 여행다울 수 있어요.


우연의 순간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 모래시계

우연에서 피어난 행복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뼛속까지 계획형 인간이에요. 재미 삼아 MBTI 검사를 해보면 다른 성향은 몰라도 항상 J가 나오네요.

하여튼 이런 제가 여행을 결심했다면, 거대한 프로젝트를 가동할 불굴의 의지를 장착했다는 뜻이에요. 미지의 세계를 공부하고, 방대한 탐험 계획을 세운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구하거든요. 특히 이번 유럽 일주는 6주라는 긴 기간 동안 10개국을 돌아보는 여정이었기에 계획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약간 과장해서 정말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우선 행선지의 전체적인 지리를 공부하고 명소를 조사한 다음, 하루 단위로 나누어 동선을 그려나가요. 뚜벅이에게 대중교통 체계 파악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중요하죠. 대략적인 루트를 확보하면 예약 여부를 확인하고, 예약이 필요한 곳들은 예약을 진행해요. 그러고선 식당 서너 군데를 찾아놓고 무엇을 먹을지 어느 정도 생각해 둡니다.

마지막으로는 사소한 내용, 예컨대 간단한 회화나 지하철 이용 방법 등을 조사합니다. 시간이 남는다면, 도시의 역사도 훑어봅니다. 그리고 위 단계를 방문하는 도시마다 합니다.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계획이 완성되었다면 계획대로 움직이는 일만 남았죠. 노션 앱에 깔끔하게 정리해 둔 표를 띄우고 한 손에는 캐리어를 쥔 채,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출국 수속을 마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어요. 이런, 목베개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여행은 늘 예측 불가능함을 동반해요.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니까요.

그런가 하면 저는 여행 내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일종의 깨달음을 추출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해요. 세계적인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철학자도 해낼 수 없어요. 여행도 삶의 일부이고, 매 순간이 특별할 수는 없으니까요.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아요.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긍정적으로 체념하며 그저 하루 동안의 분위기와 감정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것뿐이었어요.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호주에서 온 여행객 헨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네요. 로마에서 만난 우리는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졌고, 마침 헨리가 3월에 한국으로 온다길래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또 한 번은 카페 직원분들의 사진을 찍어드리고 공짜 에스프레소를 마신 적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다가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과 건축 이야기를 한 적도 있네요.

사소한 우연의 순간들이 더 기억에 남더라고요. 빅 벤이나 콜로세움, 에펠탑 같은 명소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건 여행이잖아요. 인류 문화 답사가 아니죠.

계획은 우연을 안정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디딤돌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렇게 순간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요. 장엄하게 시작한 유럽 일주에서 저는 큰 깨달음 대신 작디작고 예상치 못한 행복의 조각들을 얻었네요.

그래서, 과연 제가 우연에서 피어난 행복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온전히 가슴으로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답을 내리고자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에요. 유럽 여행에서 얻은 것은 질문 그 자체였으니까요. 앞으로의 나날들로 답을 구할 차례예요.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어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 천재지변 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 밀짚모자: 니가타의 마지막 날은 도서관에서 보냈어요. 늘 앉던 자리에서 눈 풍경을 보면서요. 좀 더 근처를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도무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없었네요.
👒 밀짚모자: 니가타의 마지막 날은 도서관에서 보냈어요. 늘 앉던 자리에서 눈 풍경을 보면서요. 좀 더 근처를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도무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없었네요.
⏳ 모래시계: 스위스 베른으로 가는 열차가 멈춰버려 대체 열차를 타고 브리그로 왔어요. 모두가 분주하게 앞으로 갈 때, 저만 뒤를 돌아봤네요. 알프스 산맥이 저를 맞이해줬어요.
⏳ 모래시계: 스위스 베른으로 가는 열차가 멈춰버려 대체 열차를 타고 브리그로 왔어요. 모두가 분주하게 앞으로 갈 때, 저만 뒤를 돌아봤네요. 알프스 산맥이 저를 맞이해줬어요.

✍️ 오늘의 한 마디

👒 밀짚모자: 귀국 짐을 정리하며 마지막 청소를 했어요. 저는 쓰레기에 강박이 있어서, 웬만하면 버리지 않아요. 음식물 쓰레기도 거의 안 내요. 덕분에 유학 생활의 막바지는 난장판이었어요. 밖에선 찢어진 신발을 신었고, 집에선 모든 조미료를 때려 넣은 괴식을 먹었죠.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서, 귀국 이틀 전에 생각을 바꿨어요. 과감하게 음식과 신발을 처분했네요. 인간에겐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아끼는 삶은 지구 이전에 인간부터 좀먹어요. 여러분, 부디 적당하게 소비합시다.

⏳ 모래시계: 이 편지가 배송되면 저는 한국에 돌아와 있겠네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향수병은 온데간데없고 눅진한 아쉬움의 감정이 밑돌고 있어요. 그래서 굳이 매일 에펠탑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네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 먼 훗날의 저는 파리에서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편지를 끼적이는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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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

    1
    3 months 전

    타국에 나와 산지 3년째, 한국사람만 보면 피해다닌 제 모습들이 떠올랐어요. 누구보다 한국을 그리워하지만 한국인들의 관심은 싫은 이상한 애증관계.. 여행지에서 나와 일행이 나누는 비밀스러운 한국말을 알아듣고 멋대로 판단할 누군가가 싫었던 것 같아요. 같은 종족을 피하려고 했던게 사실은 여행지를 깊게 느끼기 위함이었나봐요. 아직도 이곳은 제게 여행지 같아요.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낯선 환경에 서 다른 정보를 찾아 빠르게 적응하는 상태변화이지, 기존의 관계에 집착해 지금을 망치는 과시욕이 아니니까요.“ 여운이 깊은 문장을 계속 곱씹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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