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12월 첫 번째 편지로 돌아온 모래시계입니다.
어느덧 벌써 겨울이 찾아왔네요. 왠지 이 시기엔 새로운 도전보다는 그간의 다사다난했던 나날을 회고하고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할 것 같아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우주엔 처음과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12월은 1월로 넘어가기 전의 달이고, 겨울은 봄이 오기 전의 계절일 뿐이죠.
이번 편지의 주제는 '그럴 수도 있지'입니다. 이 세상에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부터 정해야 할 필요도 없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사소하게 즐겨주세요.
"버스에서 빵 냄새가 나는군."
"누군가 제과점 혹은 제빵점에서 약간 혹은 다수의 제과품 혹은 빵을 구매했을지도 몰라."
"혹은 누군가 버스 내부에서 제과 혹은 제빵 업무를 실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고정관념에 기반한 사고 방식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돼."
놀랍게도 친구가 한 말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엉뚱한 사고 방식을 친구에게서 배운 듯하다.
나는 때때로 극단적인 상대주의자가 된다.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내 입장을 생각해 보기도 전에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조금 골치 아프다. 이미 남의 의견을 흡수한 상태에서 온전히 나의 의견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보셨는지? 이 영화는 인생에서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되뇐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야'.
만약 사후 세계가 존재하고, 내가 한 사람의 업보를 평가하는 심사 위원이라면, 난 아마 끔찍하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저마다 각자의 사정을 설명하며 "어쩔 수가 없었으니 좀 봐주세요"라고 외쳐댔을 것이고, 난 그럴 때마다 판단력이 흐려졌을 테니 말이다.
나는 요즘 들어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세상만사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지만, 다소 비겁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예전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단호했다. 단번에 완벽한 결정을 내리고자 했고, 그렇게 내린 판단은 쉽게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일관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한 탓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내린 판단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순간, 그 맥락에서는 그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나는 다르게 생각할 뿐이다.
오늘 맞는 것이 내일도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어제 틀렸던 것이 오늘은 옳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되, 영원히 옳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러니 후회라는 감정도 조금 우스운 구석이 있다. 과거의 나는 그 순간 최선을 다했다. 지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가진 정보와 감정과 판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재즈가 유독 흥미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재즈에는 정해진 악보가 있지만, 연주자들은 그 틀 안에서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한다. 같은 곡이라도 그날의 기분, 관객의 반응, 함께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어제의 연주가 틀렸다거나 오늘의 연주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각각의 순간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일 뿐이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즉흥 연주를 하고 있다. 때로는 불협화음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친구와 헤어진 후에도 그의 말이 떠올랐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제빵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 나는 웃었다. 황당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 사실이 불안할 때도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위안이 될 때도 있다. 모르겠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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