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12월 두 번째 인사를 맡은 밀짚모자입니다.
내향인에게 연말·연초 분위기는 언제나 낯서네요. 거리가 예쁘고, 사람들은 들떴어요. 다들 크리스마스는 잘 보냈나요? 예전엔 ‘솔크’라는 단어가 많이 보였는데, 요샌 들어본 적이 없네요. 아무래도 20대 중반에 들어오니 다들 연애에 시큰둥해졌나 봐요.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 아사히 신문에서 ‘연애지상주의에 저항하는 시위’를 취재한 기사를 읽었어요. 솔로를 경멸하는 세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행진한다더라고요. 축제 분위기로요. 커플은 물론, 기혼자도 참여할 수 있어요. 멋진 행사죠?
저는 눈 오는 겨울을 좋아해요. 코트는 아늑하고, 입김은 귀여우며, 거리는 조용해요. 가끔 눈사람과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요. 매년 겨울 여행을 떠나네요. 이번엔 오사카에서 13박을 보내려고요. 아직 학기는 안 끝났지만, 연말에 짧은 방학을 주거든요.
이번 호 주제는 ‘혼자 하는 연말결산’입니다. 연말결산은 진부하지만 설레는 단어죠. 슬슬 일 년을 정리하며 내년을 준비하는 시기니까요. 굳이 하나하나 기록하지 않아도, 요즘엔 플랫폼이 제공해 주기도 하네요.
남은 시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 모래시계
요즘 각자만의 연말결산이 유행이네요. 벌써 스포티파이는 12월 초에 연말결산을 진행했어요. 스포티파이 자신이 연말결산의 원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요? 저는 이제 막 김뜻돌의 신작 <천사 인터뷰>를 듣기 시작했는데, 이 기록은 내년에 포함되려나요?
스포티파이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저는 올해 74,417분 동안 음악을 들었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비틀즈이며, 제가 가장 많이 들은 5곡 중에 <여름아! 부탁해>가 있네요. 이번 여름을 기억할 수 있는 노래를 찾고 싶다고 8월 편지에 쓴 적이 있는데, 드디어 노래를 찾은 듯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조금은 허전하네요. 추상적이고, 이성적이에요. 데이터는 감정을 담지 못하니까요. 음악을 들은 시간이 7만 5천 시간에 이르고, 비틀즈 사랑이 상위 0.1%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신기했지만, 그뿐이었네요.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공유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저보다 음악에 진심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고, 스토리는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연말 회고’를 해볼까 해요. 내가 얼마나 썼고, 얼마나 봤고, 얼마나 들었는지 살펴보는 대신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여 한 해를 돌아보는 거예요. 연말결산보다 느리고 심지어 부정확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깊게 돌아볼 수 있어요. 함께 보시죠.
올해 1월과 2월은 토플 시험을 준비한 기억으로 가득하네요. 일주일에 세 번, 가방에는 토플책들을 욱여넣고 종로3가역으로 향했어요. 수업이 끝나면 오후 6시. 퇴근길 지하철이 싫어 저녁을 대충 해결하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와 10~11시까지 공부하고 돌아왔어요. 아, 탑골공원 사거리에 있는 버거킹은 잘 있으려나요?
4월은 제 생애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어요. 행선지는 도쿄. 나리타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보수동쿨러 <제임스>의 기타 솔로 부분이 흘러나왔는데요, 몸도 마음도 요동치는 순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시부야의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동물병원, 신주쿠 교엔에서 풍경 스케치를 하던 미술학도, 우에노 공원에서 클래식 기타로 짐노페디를 연주하던 이름 모를 음악인. 이 모든 순간들이 짤막한 추억이 되었네요. 어쩌면 저라는 인간은 이 짤막한 추억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르겠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 왠지 모르게 불현듯 생각나는 추억이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잠이 달아날까봐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워요. 과거에 대한 설렘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 홀로 추억의 무게를 견디는 것. 도쿄를 갔다 오고 나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에요.달아날까봐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워요. 과거에 대한 설렘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 홀로 추억의 무게를 견디는 것. 도쿄를 갔다 오고 나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에요.
그나저나 긴자에 위치한 미슐랭 라멘집을 갔는데, 아직도 국물의 진한 맛이 잊혀지지 않아요. 가게 이름은 ‘카기리’입니다. 도쿄로의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꼭 가보시길.
6월과 7월은 토요일 우편함을 막 구상하기 시작하던 시기랍니다. 제 생일을 빌미 삼아 동료 밀짚모자를 만났고, 덕수궁 옆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기획 회의를 했네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첫 번째 편지의 글을 유심히 읽으면 제 글과 밀짚모자의 글에 모두 ‘덕수궁’과 ‘차’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어요. 일종의 이스터에그인 셈이네요.
8월에 토요일 우편함을 개설하고, 9월부터는 학교와 알바도 병행했어요. 갑작스레 찾아온 가을을 반가워하다가 때로는 울적해하고, 마침내 찾아온 겨울을 향해 인연에 대한 다짐을 하기도 했죠.
그렇게 올해도 지나갔네요. 삶은 당연히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방황하기도 한 덕에 다가오는 한 해를 명분 삼아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잔잔한 추억들을 돌이켜보며 뿌듯한 마음이기도 해요. 뭐, 성숙한 나날들이 있으면 미숙한 나날들도 있기 마련이죠.
연말 회고를 생각할 때면, 버드나무 아래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선비가 생각나요. 버드나무는 솔솔 부는 바람에 제 몸을 흔들고 있고, 그 옆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어요. 햇빛은 적당히 선선한 덕에 스르르 낮잠에 빠지기 좋은 날씨네요. 아무 근심 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긴 선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버드나무 아래의 선비가 우리의 모습이길 바라면서, 떠나가는 해를 붙잡지 않고 다가오는 해를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연말결산과 망년회
👒 밀짚모자
단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보통 ‘연말결산’은 세금과 소득을 빼는 ‘연말정산’이지만, 저에겐 일 년을 마무리하는 망년회(忘年會)예요. 봤던 영화, 들었던 음악 등을 인터넷으로 확인하죠. 참여자는 저 혼자지만, 디지털로 흔적을 돌아보면 모임에 나가는 느낌이더라고요. 어떻게든 세상에 연결돼 있으니까요. 굳이 “회”자를 붙이는 이유예요.
직접 할 일은 없네요. 플랫폼이 알아서 정리해 주니까요. 편하지만, 무섭기도 해요. 언젠가부터 직접 기록하고 저장하는 능력을 상실했어요. 지난주에 본 영화도 금방 잊죠. 자의식은 희미해지는데, 테크 기업은 고객 정보를 파악해요. 저보다 저를 잘 알아요. 세계로부터 은둔할 기회가 없어지죠. 의지도 소멸하고요. 이젠 감시당하지 않더라도, 나서서 신상을 보고하니까요. 삶의 박자를 알고리듬에 맞추면서요.
디지털 네이티브는 데이터의 흐름에 거스를 수 없어요. 구체적인 대응이 다를 뿐이죠. 이세돌의 78수처럼, 교란은 가능해요. 우린 엇박으로 혼란을 줄 수 있어요. 매일 음악을 들으면서도 ‘데일리 믹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영화 플랫폼에 예상 별점과 상반되는 평가를 게시하거나, 챗GPT를 배제하고 과제를 작성하거나, 러닝 앱 없이 달리거나, 전자책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종이 신문까지 구독하면서요.
완벽한 저항은 불가능하지만요. ‘디지털 디톡스’ 유행은 절망적이에요. 제가 나열한 예시들은 이미 시류에 포섭됐어요. 소위 ‘갓생’과 연계하며 자기 계발을 부추기는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았죠. 숨 막히는 압박이에요. 꾸준히 공부를 쌓아온 중산층이 아니라면, ‘갓생’에서 자기를 계발할 가능성은 없어요. 애당초 불가능하고요. 미라클 모닝이고 뭐고, 당장 빨래가 밀려 있어요.
정치적 입장과 반대로, 올해 연말결산도 과시하고 싶네요. 내가 이렇게 꾸준히 살았다, ‘음잘알’이다, 너희들은 게으르다… 결국 공유하진 않았죠. 참느라 고생했어요. 고상한 이유는 아니에요. 주위에 먼저 올린 친구가 없었고, 지금 상황도 초라해서요. 대학교 4학년인데, 휴학이 길었고, 여전히 진로를 방황하며, 마땅한 특기나 간단한 ‘스펙’ 한 줄도 없거든요. 인간의 조건은 모순이라지만, 글에서만 윤리적인 자의식이 부끄럽네요.
한 해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에요. 윈도우XP 시작 화면처럼요. 2010년대에 컴퓨터 폐인 경력이 있어서인지 ‘새로운 시작’이 설레네요. 진부한 문구라서 재밌어요. 부팅이 완료되면 늘 보던 배경 화면과 지우지 않은 툴바로 가득하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화면에 묻은 미세한 개성이 사랑스러워요. 남겨온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졌고, 모두가 세계에 연루돼 있어요. 엉뚱하고 비천한 삶도 필요해요. 저는 아직도 ‘꿈’이 없지만, 앞으로 돈과 명예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요. 가졌던 적도 없고, 걔네도 저에게 관심이 없어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나네요. 일단은 졸업이 목표예요. 즐거운 일 년이 되길 바라요.
📸 토요일 사진함
🎞️ 우편배달부 두 명이 토요일에 마주한 순간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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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한 마디
⏳ 모래시계: 저는 매년 연말에 저만의 시상식을 개최하는데요, 올해의 앨범과 아티스트, 올해의 영화는 꼭 정하는 편이에요. 아직 수상작을 정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앨범 후보로는 보수동쿨러의 <의자에 앉아>와 혁오와 선셋 롤러코스터의 <AAA>가 있네요. 한편, <백만엔걸 스즈코>와 <퍼펙트 데이즈>가 올해의 영화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할 듯해요. 사실 <백만엔걸 스즈코>는 2008년에 나왔지만, 제가 올해 봤다면 후보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도 되지 않겠어요?
👒 밀짚모자: 신작을 찾아보는 성격은 아니에요. ‘2024년 베스트’를 선정할 조예도 없고요. 그래도 좋은 작품을 자랑하고, 공유하고는 싶어요. 올해 가장 좋았던 음악 앨범은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와 김사월의 <디폴트>네요. 부드러운 박력이 대단한 친구들이죠. 도저히 하나를 고를 수 없더라고요. 영화는 <루트29>가 인상적이었어요. 캐릭터가 사랑스럽고, 이야기가 엉뚱한 로드무비예요. <여기는 아미코> 감독님 작품이더라고요. 책은 소설집 <버섯농장>이 기억나네요. 건조하고 거친 문체가 매력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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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_balance
사람들은 연말을 특별하게 여기지만, 정작 과거를 회상하며 정체된 상태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 점에서 아이러니한 .... 그래서 연말은 여러모로 정산의 시즌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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