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실망했던 순간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서흘입니다.
서서히 뉴스레터의 네 번째 편지도 맡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제주에 살고 있는 세 명의 작가들이
매주 월요일, 제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보려고 합니다.
이번 주제는 "실망"인데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실망은 원래 기대할수록 커지는 법이래요.
그래서 실망마저도 애정의 한 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어떻게 제주에서 실망을 마주하고,
그럼에도 서서히, 제주에 스며들었을까요?
<오늘의 주제>
"제주에서 실망했던 순간"
❶ 서흘 - 상처 받거나, 치유하거나
❷ 서림 - 차가 없는 제주도민의 이야기
❸ 서나 - 여전히 제주를 좋아한다는 말
1. 상처 받거나, 치유하거나
서흘
제주는 제주라는 이유로 많은 것이 용인되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마법 같은 곳이다.
그래서 때로는 많은 이들이 그 환상에 취해 선을 넘으려고 한다.
너무 목적이 있거나, 혹은 아무 목적도 없거나.
너무 개방적이거나, 혹은 너무 폐쇄적이거나.
가장 알차게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가장 시간을 느리게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한다.
제주에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수많은 이들을 만났고,
안타깝게도 그중 절반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만남을 고수하는 이유는,
나머지 절반의 좋은 기억들이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자락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있다.
“결국 사람은 사람으로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하는 거야.”
제주만큼이나 상처받고 치유하기 쉬운 곳이 없다.
제주는 제주라는 이유로 많은 것이 용인되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마법 같은 곳이다.
나는 앞으로도 제주에서 많이 실망할 거고,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다.
2. 차가 없는 제주도민의 이야기
서림
솔직히 말하면, 다시 제주에 살 것 같진 않아요.
전 1년 동안 숨어서 조용히 살 곳을 찾다 제주에 살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주살이에 대한 큰 로망은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바다는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있었죠.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어요.
차가 없으니 어딘가를 가고 싶어도 가는 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차로 20분이면 가는 장소도, 버스를 타면 1시간씩 걸리기 일쑤이고,
환승하려고 내린 버스정류장에 다음 버스가 아예 없을 때도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고,
한 달에 바다를 보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지자
‘여기가 정말 제주가 맞나?’ 하는 실망스러운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제주에 산 걸 후회하냐고요?
아니요. 그럼에도 저는 제가 보는 제주가 좋아요.
물론 차가 있었다면 훨씬 더 다채로운 제주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뚜벅이인 지금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순간들도 분명 있거든요.
매일 비슷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우연히 찾은 조용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요.
언제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관광객 맛집이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뻥 뚫리는 바다는 자주 못 느끼지만
저는 제 속도대로 천천히 제주에 스며들고 싶어요.
지금처럼요.
3. 여전히 제주를 좋아한다는 말
서나
실망.
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더라고요.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거나 기대에 어긋나서 마음이 상함.”
“제주에 실망한 적 있나요?”
이 질문을 듣고, 제주에 실망한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제주에 크게 실망해 본 적은 없어요.
의외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제 경우에는 그런 것 같아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 토박이다 보니
이 섬은 언제나 거기 있는, 너무도 익숙한 공간이거든요.
‘실망’보다는 ‘일상’에 가까웠던 곳이에요.
물론, 작은 실망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SNS에서 보고 기대했던 명소에 도착했는데,
사람들로 북적이고, 주차장은 가득하고,
사진 속 고요함은 온데간데없던 그런 순간들요.
풍경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그 장소에 품었던 기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런 경험을 겪고 나니,
기대를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계획 없이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들꽃이,
생각 없이 올랐던 오름 위의 바람이,
문득 창밖으로 스쳐 간 수평선이
훨씬 더 마음 깊이 남더라고요.
실망이라는 감정은 결국 기대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기대를 내려놓으면 오히려 감탄이 자주 찾아오곤 해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제주가 좋아요.
새소리로 잠을 깨고,
걷는 길 위에서 작은 풍경에 발길을 멈출 수 있고,
바다가 보고 싶을 땐 그저 차를 몰고 조금만 나가면 돼요.
그 모든 순간이 여전히 여행처럼 느껴지거든요.
제주에서 실망한 순간은 있었지만,
‘제주’ 자체에 실망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조금 멀찍이 바라보면, 여전히 참 괜찮은 곳이에요.
여러분은 어떤 순간에 제주에 실망하셨나요?
그리고 그 순간을 지나, 여전히 이곳이 좋다고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요즘 빠져 있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요.
서초동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서초동』입니다.
이 드라마를 추천드리는 이유는,
서로 실망도, 오해도, 고난도 계속 발생하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과 결말이 너무나 따뜻해서인데요.
‘실망’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성숙하게 해결해 나가는지
보고 싶다면 추천드립니다.
이번 뉴스레터의 주제인 <제주에서 실망했던 순간>은 어떠셨나요?
제주에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게 됩니다.
그중에선 제주에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들처럼, 제주에 살면서 제주에 실망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번 뉴스레터를 작성하면서 느낀 건
우리는 제주에 실망하기엔 아직 제주를 많이 좋아한다는 거였습니다.
실망을 다시, 더 좋은 기억으로 채워보아요.
실망을 하기엔 제주는 아직도 너무 아름다우니까요.
다음 주 주제는 <최근, 내 마음에 여운을 남긴 책>입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
서서히 뉴스레터 https://maily.so/seoseo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