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배터리 업계에 조용하지만 묵직한 변화가 하나 있었는데요. 올해 1월 국제표준 ISO 3941:2026이 리튬이온전지 화재를 별도의 L급 화재(Class L)로 새로 분류했습니다. 화재 분류 체계가 손질된 건 2007년 판 이후 처음입니다. 리튬전지 화재는 기존 방식으로 끄기 어렵다는 사실을 표준이 공식 인정한 셈이죠. 마침 데이터센터에서 배터리 화재가 이어지면서 이 변화의 무게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ISO 3941은 화재를 연료 유형에 따라 나누는 국제표준입니다. 그동안 고체(A급)나 액체(B급) 같은 방식으로 화재를 구분해 왔죠. 2026년판은 여기에 리튬이온전지 화재를 뜻하는 L급을 새로 넣었습니다.
대상은 금속 리튬이 없는 리튬이온 셀과 전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삼원계(NMC)나 리튬인산철(LFP)이 모두 여기에 들어가죠. 표준은 새 조항에서 이 화재의 위험 특성도 함께 못 박았습니다. 열폭주 연쇄반응과 유독·가연성 가스, 밀폐공간 폭발, 셀과 전해액의 분출, 그리고 재발화 위험입니다.
한 가지 짚을 점은 ISO 표준이 그 자체로 강제 법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국이 자국 기준이나 소방 규정에 채택하고 인용할 때 효력이 생기죠. 영국은 이미 BS ISO 형태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은 자체 화재 분류를 쓰고 있어 L급 반영 여부는 앞으로 지켜볼 대목입니다.
👉 리튬전지 화재는 왜 다를까요?
리튬전지 화재의 핵심은 열폭주(Thermal Runaway)에 있습니다. 셀 내부 재료가 스스로 분해되면서 열과 가연성 가스를 쏟아내는 현상이죠. 외부 산소에 기대지 않고 셀 안에서 반응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산소를 차단해 불을 끄는 전통적인 방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기존 소화 방식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할론계나 불활성가스 소화약제는 산소를 막거나 온도를 낮춰 불을 잡죠. 겉의 불꽃은 꺼도 셀 내부의 화학반응까지 멈추지는 못합니다. 껐다고 보이는 순간에도 전지 깊은 곳에서 열폭주가 계속 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발화(Re-ignition)가 큰 문제입니다. 불을 잡은 뒤에도 셀에 남은 에너지로 다시 불이 붙기 때문이죠. 진화보다 진화 이후의 지속 냉각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냉각 성능이 좋은 미세 수분무(Water Mist) 방식이 주목받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납축전지(Lead-acid)는 위험의 축이 달라서 수소 가스와 전해액 누출을 막는 방폭 환기와 가스 탐지가 관건입니다.
👉 데이터센터 사례는 무엇을 알려줄까요?
데이터센터는 정전에 대비해 UPS와 백업 전원용 배터리를 대량으로 두는 곳입니다. 최근 이 배터리에서 시작된 화재가 잇따르고 있죠. 두 사례가 특히 많은 것을 보여 줍니다.
먼저 한국입니다. 2025년 9월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UPS용 리튬이온 배터리가 발화했습니다. 배터리를 서버에서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작업 도중 불꽃이 튀었죠. 이 배터리는 사용 연한이 2024년 8월에 지났지만 교체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화재로 700개가 넘는 정부 업무 시스템이 장시간 멈췄습니다. 노후 배터리 관리와 대응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 사고죠.
다음은 네덜란드입니다. 2026년 5월 알미어의 NorthC 데이터센터에서 백업 전원과 배터리 구역에 불이 났습니다. 임시 전원을 살리는 데만 엿새가 걸렸고 정상 전원 복구는 두 달 넘게 이어졌죠. 인근 대학과 대중교통 관제까지 멈추며 피해가 밖으로 번졌습니다. 재발화를 막는 지속 냉각과 재해 복구 예방이 왜 필요한지 드러난 사례입니다. 두 사고가 가리키는 방향은 같습니다. 무리하게 불을 끄기보다 고장 구역을 격리하고 경계를 냉각해 번짐을 막는 쪽으로 대응이 옮겨 가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오늘은 리튬전지 화재를 별도로 규정한 ISO 3941:2026의 L급 화재와 데이터센터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핵심은 일부 화재는 끌 수 없고 제어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표준이 인정했다는 점이죠. 열폭주는 외부 산소에 기대지 않아 산소 차단만으로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셀을 만드는 쪽과 쓰는 쪽 모두 이 전제를 설계에 담아야 합니다. 특히 리튬전지가 UPS와 ESS로 빠르게 퍼지는 지금은 더 그렇죠. 아직 L급의 정량 모델과 시험 체계는 자리를 잡는 중입니다. 표준의 정의가 현장의 공학으로 이어지는 것이 다음 과제입니다. 결국 지속 냉각을 전제로 한 안전 설계가 새 기준의 출발점이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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