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AI를 둘러싼 글들을 읽다 보면 비슷한 문장이 반복된다.누구나 만들 수 있게 됐다.작은 팀도 큰 회사를 만들 수 있다.기술의 민주화가 시작됐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문장만 붙잡고 있으면 핵심을 놓친다.
진짜 변화는 “이제 누구나 만들 수 있다”가 아니다.진짜 변화는 누구나 만들 수 있게 된 순간, 만드는 것 자체는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게 됐다는 데 있다.
Tom Leung의 The New Rules of Building은 바로 그 전환점을 다룬다. 글의 표면적 메시지는 낙관적이다. 클라우드와 API가 초기 자본 장벽을 낮췄고, 앱스토어·소셜·PLG가 유통 장벽을 무너뜨렸고, 오픈소스와 생성형 AI가 코드 생산의 난도를 크게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다. 실제 글은 이 세 축, 즉 자본·유통·코드의 장벽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고 본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하지만 이 글의 진짜 포인트는 그 다음 문장에 있다.
기존 강자의 해자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해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자본이 해자였다.팀 규모가 해자였다.복잡한 조직과 긴 검토 프로세스조차 해자로 작동했다.남들이 쉽게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AI는 생산 비용을 낮췄고, 클라우드는 시작 비용을 낮췄고, 배포 채널은 시장 진입 비용을 낮췄다. 그 결과, 대기업의 장점이던 것들이 때로는 속도를 늦추는 관성으로 바뀐다. 글이 말하는 “새 규칙”은 단순히 스타트업 찬양이 아니라, 큰 조직의 강점이 자동으로 우위가 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글은 Gamma를 든다.Gamma는 ChatGPT가 나온 직후인 2022년 12월, 회사 전체를 AI 중심으로 다시 설계하는 쪽에 베팅했고, 약 3개월 뒤인 2023년 3월 재출시했다. 글은 그 결과로 초기 3개월 300만 사용자, 빠른 현금흐름 흑자 전환을 제시한다. 이후 Gamma는 2025년 11월 기준 1억 달러 ARR, 70 million users, 21억 달러 valuation을 공개했다. 이 수치는 TechCrunch와 Gamma 자체 발표에서도 확인된다.
많은 사람이 이 사례를 보고 “역시 속도가 중요하구나”라고 말한다.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Gamma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속도가 아니다.더 본질적인 건 무엇을 빠르게 바꿨는가다.
AI 시대에는 제품을 빨리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모두가 빨라졌기 때문이다.이제 속도는 희소한 능력이 아니라 기본값에 가깝다.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기능을 추가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품의 존재 이유를 다시 쓰고 있는가.
Leung은 이 차이를 AI-enhanced와 AI-native로 나눈다.AI가 빠져도 제품은 돌아가지만 조금 덜 편해지는 수준이면 AI-enhanced다.반대로 AI가 빠지면 제품의 핵심 가치 제안이 무너진다면 AI-native다. 이 구분은 날카롭다. 왜냐하면 지금 시장에는 AI를 붙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SaaS에 기능 하나 더 얹은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AI-enhanced 제품은 대개 “생산성 개선”에 머문다.조금 더 빨라지고, 조금 더 편해지고, 조금 더 보기 좋아진다.하지만 AI-native 제품은 사용자의 행동 자체를 바꾼다.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누구나 만들 수 있는지, 얼마나 빨리 시작할 수 있는지를 바꾼다.
AI 시대의 승자는 후자에 더 가깝다.기능을 붙이는 팀이 아니라, 워크플로우를 다시 설계하는 팀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가장 실전적인 부분은 “모트가 어디에 쌓이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Leung은 새 시대의 해자로 독점 데이터, 네트워크 효과, 워크플로우 침투, 고위험 분야의 브랜드 신뢰, 배포 채널, 창업자의 도메인 전문성을 제시한다. 이 목록은 꽤 설득력 있다. 모델은 점점 공용화되지만, 데이터와 신뢰와 배포는 쉽게 공용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특히 중요하다.많은 팀이 아직도 “우리도 좋은 모델만 붙이면 된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좋은 모델은 곧 모두의 것이 된다.API는 공유되고, 기능은 복제되고, 데모는 빠르게 평준화된다.
결국 오래 남는 회사는 모델을 가진 회사가 아니라,모델 위에 비대칭 자산을 쌓은 회사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사용자가 떠나기 어려운 업무 흐름.쓸수록 축적되는 데이터.고객이 함부로 대체하지 못하는 신뢰.이미 고객이 있는 배포 채널.문제를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는 도메인 감각.
말하자면, AI는 해자를 없앤 것이 아니라 **“모델 바깥에 해자를 다시 쌓으라”**고 요구한 셈이다.
여기서 기존 기업들이 자주 착각하는 장면도 보인다.기존 기업은 종종 AI를 “도구 도입” 문제로 본다.새 모델을 붙이고, 사내 챗봇을 만들고, 파일럿 몇 개를 돌리면 전환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이 암묵적으로 말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AI의 승부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누가 문제를 정의하는가.누가 실험할 수 있는가.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누가 실제 고객 신호를 받는가.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도입은 해도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그래서 대기업이 느린 이유는 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라,기술을 조직 구조 안에서 실제 행동으로 바꾸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의 낙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부분도 있다.소규모 팀으로도 큰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은 맞지만, 그것이 운영 복잡성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엔터프라이즈 통합, 보안, 권한관리, 규제 대응, 안정성, 데이터 거버넌스가 중요해지는 순간부터 다시 깊은 기술 리더십이 필요해진다. AI는 시작 비용을 낮췄지만, 신뢰 비용까지 없애진 않았다. 이 점은 글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부분이다.
그래도 이 글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유효하다.
당신은 아직도“무엇을 더 만들까”를 묻고 있는가.
아니면 이제“무엇을 다시 정의할까”를 묻고 있는가.
지금 시장에서는 둘의 차이가 크다.전자는 기능 로드맵이고, 후자는 회사의 방향이다.전자는 개선이고, 후자는 재설계다.전자는 유지보수의 언어이고, 후자는 시대 전환의 언어다.
결국 AI 시대의 새 규칙은 이것이다.
만드는 능력은 기본값이 됐다.이제 승부는 배포, 데이터, 신뢰, 워크플로우, 그리고 판단에서 난다.
더는 “우리도 만들 수 있다”가 강한 문장이 아니다.이제 강한 문장은 이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쌓일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팀은아무리 빨리 만들어도 남지 못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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