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이야기는 다소 종교적인 색채와 내용이 있습니다. 순화시키거나 빼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제 진짜 이유를 보여드리는 데는 이것이 가장 최적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대 후 이틀 후. 에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선교병원에서 6개월간 견습선교사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억에 남는 시간이 바로 'Devotion Time'입니다.
각 선교사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인데요. 요약하면,
'당신은 어떤 삶의 여정과 연단을 거쳐, 이 곳에 있는가? 입니다.'
뉴스레터의 첫 시작 역시, 이 물음에 대해 지금의 답을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왜 퇴사하셨어요?'
제 약력을 말씀드리면 꼭 뒤따라오는 질문입니다.
퇴사에는 한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이유,
어려움을 견딘 이유를 설명하진 못합니다.
장밋빛 환상,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현실을 만나는데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가치를 둔 목표들은 생각보다 쉽게 타협하고, 희석됩니다.
반면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목표를 둔 경우에는 현실을 견딥니다.
그렇기에 좀 더 날카로운 질문은 '무엇 때문에 견디셨어요?'가 맞을 듯 합니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어느 종교이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과 끝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과 같을 것 입니다.
제가 믿는 신앙에서는 죽음 후에 한명도 예외없이 절대자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절대자는 무엇을 물어볼까요?
"너 왜 그 프로젝트는 수주하지 못했니?"
"너 왜 좋은 직장 넣어줬는데,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집 하나 장만하지 못했니?"
"왜 그때 거기 투자하지 않았니?"
"니 자식 교육은? 재산은? 집 하나 못해주고 왔니?"
당시 제가(누구나) 고민하던 문제들은
근원적인 질문 앞에선 경중조차 따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절대자라면 이런 짜?치는 질문을 하진 않을 것 같았어요.
제가 묵상하며 들었던 생각은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00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네 엄마, 아빠 00에게 어떤 아들이었니?"
"사랑하는 00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네 아내 00에게 어떤 남편이었니?"
"사랑하는 00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네 자녀 00에게 어떤 아빠이었니?"
"사랑하는 00야.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니?, 너가 사랑한 것은 뭐니?"
이 질문의 답을 곱씹으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성취보다 한 아이가 뿌리내릴 수 있는 가정을 가꾸는 것.
충실한 아빠와 남편의 삶이 어떤 성공한 인생보다도 절대 작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의 삶은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입니다.
'지금'을 설명하다보니 다소 진지한 부분이 있네요.
다음 번엔(앞으론) 좀더 가볍고 소중한 일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햇볕이 좋습니다. 안온하고 시원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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