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더니 오지 않던 장마가 드디어 왔구나 했어요. 아침 내내 퍼붓듯 내리던 비가 조금씩 멎더니 저녁 무렵 하늘엔 구름만 잔뜩 끼어 있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집에 와서 이 글을 씁니다. 눈뜨자마자 갑자기 퍼붓던 걱정도 있었고 지금은 이런저런 고민이 자욱해서 오는 길에 얇은 노트와 얇은 펜을 샀어요.
그 노트에 적힐 얇은 글씨들. 어떤 내용이 적힐지 대충 예상이 갑니다. 돈 이야기 아니면 사랑 이야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꿈을 상상하려고요. 올해 남은 시간은 그 인물들의 대화를 받아 적을 거예요.
세상에 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을까요.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을까요. 돈 때문에 죽고 싶어도 사랑이 있으면 사람은 또 살까요. 요즘 저는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4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했어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장기기증 신청도 같이했어요. 멈춰도 멈추지 않은 부분들. 그 부분들이 희망이 되는 건 분명 가치가 있지만, 그 희망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제적 부담을 더해주고 싶지 않더라고요. 또 한편으로는 그 부분을 채우면 전체가 될 사람들이 있으니 거기에 다른 희망을 걸면 되겠다 해서요. 물론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결정에 서운할 수도 있겠어요.
어릴 때부터 한 생각이었는데 점점 더 그 결정이 지금 제게는 맞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아무래도 제가 바라는 제 삶은 확실히 모양이 잡혀 있어서. 죽음의 기로도 제 기준대로 가늠해보지만 정말로 어떻게 죽게 될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네요.
다만 저도 주변도 여러 번 고통받지 않고 제가 단숨에 죽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바닥에 있어요. 왜 오래 살 생각을 하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오래 살 생각과는 상관없는 마음이에요. 오래 살다가 단숨에 죽기 같은 소원보다는 하루라도 잘살고 단숨에 죽기 같은 소원을 비는 중입니다.
살면서 너무 큰 목표를 세울 때가 있어요. 크다는 건 멀다는 게 아닌데. 너무 먼 미래를 그릴 때가 있어서 그게 참 오묘해요. 미래가 온다는 감각 같은 게 삶에 스며있다니. 꿈처럼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에 가까운 게 아닐까요.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라 오늘 같은 날처럼.
얇은 노트에 얇은 펜. 얇은 글씨지만 분명히 적고 싶은 몇 자가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라는 충고 말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살라는 축복을 빌고 싶은 삶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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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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