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에 목격했습니다.
인도에 버려진 빈 스티로폼 박스가 차도로 날아갔습니다. 취급주의 스티커를 두른 박스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신호 대기 중이던 차들이 돌진해 오면 산산조각날 위치로 서서히 이동 중이었습니다. 두어 번 스치듯 차바퀴에 닿은 박스의 귀퉁이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신호 대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정확히 중앙선을 침범하기 직전의 박스를 누군가 쏜살처럼 달려가 살포시 주워 왔습니다.
발포 스타이렌 수지. 스티로폼의 본명입니다. 뭔가 강력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발포라니. 사이렌도 아니고 스타이렌이라니. 수지라니.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는 행동인데. 대로변 가게 입구 문턱에 망가진 박스를 두고 간 사람. 그 사람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 여러 사람을 구하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생각했습니다.
일상은 그런 일들의 연속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살아 있는 시간은 누군가 구해준 시간이겠죠. 그조차도 자각 못하고 지나가는 시간은 안전하다 할 수 있을 테고요. 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고나 참사로 안전불감증을 실감하게 돼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상이 좋고 또 소중하지만 당연하지는 않다고 여기게 되네요. 그런 식으로 감사하게 되는 동물이 인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저는 오늘 하나도 감사하지 않다가 불쑥 감사하려니 민망해요. 감사한 것들을 좀 적어볼까 했는데 어딘가 조금 박살났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네요.
다만 한때 죽을 뻔한 어느 날들이 생각납니다. 빈 스티로폼 박스 같은 누군가의 말 때문에. 그 말들이 자꾸 마음을 장악해서 힘들었을 때요.
예전에 봤던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그런 대사가 있었어요. 내 말이 네 마음에 가서 그렇게 유언처럼 남은 줄 몰랐다고.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도 말해요.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고요.
좋은 말도 나쁜 말도 자생력이 있어서 좋고 나쁜 말의 분포도에 따라 마음이라는 자연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병들기도 해요. 제 기준 가장 나쁜 말은 거짓말인데, 종종 선의의 거짓말이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까보면 자신의 욕심을 누리고자 하는 거짓말이 대부분인 세상에 가장 좋은 솔직한 말은 무엇일지 고민해본 밤이에요. 자신의 마음을 알듯 모를듯 그럴 때도 인간은 거짓말을 참 잘하는데요. 그럼에도 내 마음 솔직한 선택을 하고, 다른 기회들을 놓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말을 좋아해요. 믿음의 죽음을 원치는 않거든요.
요즘엔 드라마 〈굿파트너〉를 재밌게 보고 있어요. 자신의 마음에는 한없이 솔직해지면서, 또 솔직하지 못한 채 모든 욕심을 거느리고 사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외도 같은 부부의 문제를 보면서 아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방법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살아도 죽은 것 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았으면. 그런 기분을, 마음의 타살을 막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아요. 막을 수 없었대도 어느 틈을 노려 용기 있게 치고 빠지는 누군가의 말이 갱생시키기도 하니까. 겁 먹지 않고 사랑도 꾸준히 하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믿어봐도 좋은 인생이길.
사는 동안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고 2024년 7월 24일자 유서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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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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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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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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