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20

2022.05.04 | 조회 595 |
0
|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테트리스 노템전에서 긴 막대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아. 최선을 다하긴 하는데 묵은 체증이 차올라 곧 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보통 야무지게 산다 싶은 사람들은 빈 공간을 잘 알더라고. 작은 기회들도 놓치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해. 물론 너무 고맙다는 말을 인사치레로 던지고 부탁을 하는 건 좀 그래. 얄미워. 순간순간 어떤 블록이 내려올지. 어떤 위치에 내려야 할지. 어떤 기회로 어떤 과정을 보상받을지. 몰라. 늘 조마조마해. 이럴 때 키워야 하는 힘은 순발력이더라. 방향키를 몇 번 누르고도 시간이 남는 게 조금은 지루해서 스페이스바를 '탕' 하고 누를 때. 그게 또 적당한 위치에 잘 놓여졌을 때. 그때마다 작은 쾌감들을 느끼면서. 그렇게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생각하는 안정이란 그런 것 같거든. 나에게 많은 방법을 시도할 기회가, 여유를 지루함으로 받아들일 만큼 자신만만한 상태. 그런데 결국 테트리스도 일정 시점에 접어들면 블록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잖아. 어느 순간에는 순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더라. 근데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와 버리는 경우가 있어. 운이 없는 경우지. 운이 없는 사람. 운이 없는 시기에 하필 또 그 블록을 마주하게 된 사람. 유명인, 재력가,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 자기 자신도 열심히 했지만 비교적 운도 나쁘지 않아서 남들이 선망하는 길을 오래 걷고 있는 사람. 최근에 TV를 보던 엄마가 그러더라고. 저 사람도 많이 늙었네. 사람 사는 거 알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인생 별 거 없다. 왜 살아가면서 점점 더 무상함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는 걸까. 그리고 그 사이에 헤매고 헤매던 시간들은 무엇을 향한 결기였던 걸까. 난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이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세상 귀한 풍경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나이 드신 분들의 머쓱해 하는 표정을 보면 더더욱 그래. 진짜 그런 표정을 짓는 어르신들이 몇 없는 것 같아. 나도 좀 더 어른이 되면 그런 웃음, 그런 머쓱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을까. 어릴 땐 그냥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어. 막연하지만 멋진 어른. 근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극과 극은 통한다잖아. 인생에서 아주 어린 시절과 아주 늙은 시절에 가장 환하고 부끄러운 부분들을 애써 감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을 잘 살아야겠어. 너무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고 무던하게. 하염없이 긴 막대기만 바라지 말고.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추신, 안녕하세요. 푸른 오월입니다. 내일은 어린이날이고요. 지난 레터에 이어 이번에도 대화체(라고 썼지만 독백체)로 된 발화들을 실어 보내요. 그동안 어떤 어린이날을 보내셨고, 어떤 어린이에서 어떤 어른으로 자라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유년기 매년 바뀌었던 장래희망 중에 하나였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저녁입니다. 뭐가 되는 꿈보다는 뭐를 하는 꿈을 자주 꾸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루하루 덜 허무해지는 인생을 살고 싶네요. 모쪼록 마음 맑은 날 보내시길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