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극을 마쳤는데 한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인기에 휩싸였다. 이때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인기의 무서움을 인지하고 새로운 배역을 찾아 자신의 연기에 집중하는 것뿐인가.
인기의 무서움은 무엇일까. 인기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일까. 아니다. 똑같은 경험 속에서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순 없어도 상상하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가당치 않다고 느끼면서도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삶에 거품이 일 때는 되도록 다 헹궈질 만큼 물을 맞거나 적은 물을 맞더라도 열심히 제 손으로 헹궈낼 방법을 찾는 게 좋다.
비인기 종목의 생활을 하더라도 역할의 발목잡기나 꼬리잡기가 가능하다. 세상이, 누군가가, 문득 나를 주목한 듯한 느낌이 들 때. 그게 선망의 눈빛이든 감시의 눈빛이든. 아무리 작은 역할이더라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받거나 사랑을 가장한 어여쁨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받게 된 호의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버거워지는 순간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도, 누군가도, 눈여겨보지 않는 순간에는 어떤 사랑으로 내가 나를 지켜갈 수 있을까. 역할 없이. 무대 없이. 필름 없이. 분장 없이. 조명 없이. 박수 없이. 함성 없이. 효과 없이. 상대 없이. 내가 나를 연습하는 시간을 잘 보내고 싶다.
부단한 연습은 재고 따지는 일 없이 하루 더 열심히 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날이 기념일이 될 순 없다. 몇 년 전 오늘을 정확한 주기에 맞춰서 기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았던 하루를 무심코 떠올려 기억해내는 우연하고도 부지런한 날들을 산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시계도 달력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심정으로 막연히 지내다가도 어느 때와 비슷한 날씨나 일들을 겪은 날, 한때 맡았던 냄새를 다시 맡거나 문득 기억 속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 음악을 듣게 된 날, 되새기고 싶은 맛이나 적정한 온도의 음식을 먹은 날, 그런 날들에 살포시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날이 있다는 것만 해도 나는 나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있다. 좋다. 싶다. 충분하다. 모른다. 단언하거나 좋은 것에 가능성을 점치는 표현으로 각 문단의 끝을 매듭짓는 오늘 저녁. 매일은 어렵고 드문드문 일기를 적는다. '미세먼지 좋음'이라는 표현처럼 호응이 맞지 않아도 괜찮다, 숨을 크게 쉬어도 걱정 없다는 기쁨을 알릴 수 있다면 귀여운 오류를 범해도 문제없다, 다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말들을 고르며 배운다.
"혹시, 더 헹구고 싶으신 곳 있을까요?"
손님의 머리카락을 헹구던 미용사가 건네는 친절한 말을 신이 가로채서 해줬으면 하는 날들 속에서. 손에 닿지 않는 삶의 가닥가닥, 마음 구석구석의 찝찝함과 가려움들. 애먼 부분에서 오히려 크게 일어나는 거품을 응시한다. 삶이라고 다를까.
지위 높은 역할에 심취한 사람들을 피해 가장자리로 가서 운을 맞춰본다. 그게 아니라면 한 짝만 남은 귀걸이나 잘 쓰지 않은 동전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걸을 때마다 잔잔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상상을 하면서 걸어가본다.
상대적 불행을 타파할 절대적 행복은 오히려 그런 쪽에 있지 않을까.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지만,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만 주어진 아주 작고 작은 쪽.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