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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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5 | 조회 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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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텅 빈 공간에서는 뭐든 잘 울린다. 발소리, 목소리, 하나둘 짐을 들일 때 소리는 더 이상 빈 벽을 타고 헤매지 않는다. 짐과 함께 놓인다. 그렇다. 약간의 짐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겉도는 기분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짐을 들여서 문제다. 나만 아는 위치가 늘었다. 뒤섞인 일들과 그것을 대하는 감정의 위치가 그렇다.

새벽잠에서 깨어나 이불을 뒤척이다 말고 가만히 누워서 냉장고 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내고자 했던 냉장고의 의도 같은 건 없으나 어쩐 일인지 그 소리와 함께 골똘해지고 마는 건 내 안에 상하기 쉬운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그러나 이때 그 이유를 찾아 불쑥 꺼내 둔다면 다음 날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생길 게 빤하다.

억지로 잠에 들었다가 조금 덜 피곤한 몰골로 집을 나선다. 오늘따라 안색이 좋아 보인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누군가가 그렇다고 알려주는 날도 있지만 매번 내 상태와 정반대로 다가오는 말들이라 가볍게 밀어내며 일과를 마친다. 피상적인 관심으로는 어떤 것도 꿸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나 또한 아무것도 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잘 때 어느 방향으로 머리를 두면 좋지 않다더라. 방 문과 거울이 마주 보도록 배치하는 것도 좋지 않다더라. 현관에 해바라기 사진이나 그림을 두면 좋다더라. 이런 말들을 듣고도 그냥 무던히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계절과 상관없이 연거푸 찬물을 마셔댄다. 속에 식힐 것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생각한다. 

미지근한 물이 건강에 좋다. 식사 도중 물을 마시면 좋지 않다. 그럼에도 내 속은 비어 있을 때나 채워갈 때나 찬물을 즐겨 찾는다. 그러다 아주 가끔 많이 아픈 날에는 지독하게 뜨거운 물을 호호 불어가며 마신다. 물의 온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변수로 인해 죽고 사는 것이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이 그렇듯 머무는 곳이 깨끗하면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예감이 아닌 체감으로. 설렘보다는 익숙함으로. 가까운 곳을 향해 길을 나설 때 방 안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짚게 되는 편안한 옷가지 같은 따뜻함이 오늘 내게 남은 사랑이라면 좋겠다.

늦은 저녁 산책하려고 걸치고 나온 후드처럼 나름의 기능성을 갖춘 캐주얼 차림의 사랑.

차가워도 얼지 않을 만큼 유연한, 뜨거워도 증발하지 않을 만큼 유연한, 물의 찰랑거림을 지켜보는 게 좋다. 잠잠해지면 잠잠해질수록 거울이 되는 사람 곁에서 경쾌하게 내던져질 자신이 있다면 어떨까.

손에 쥘 만한 작은 돌이 되고 싶다가도 물 속에서 모래가 되려면 어떤 세월을 지나야 하는지 도통 몰라서 가장 낮은 자리의 물살로 겨우 살아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에는 먼저 모래가 된 바닥들을 짚고 간다. 푹신한 요 위에서 뒹굴거리듯 작은 순간들을 디딘다. 물 속에서 모래를 쥐고 있으면 그래도 조금은 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추신, 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찍은 사진으로 섬네일을 만들었어요.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새해에는 메일링 서비스 안에서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해보려고 해요. 새로운 기획도 몇 가지 해두었고, 이전에 했던 인터뷰 형식의 콘텐츠도 꾸준히 발행할 생각입니다.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주변에 알음알음 알려주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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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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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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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고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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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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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밍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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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3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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