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있다. 한데 있지만 엉켜 있는 것과 나란히 있는 것.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관계들. 그 가운데 어떤 관계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고민해본다.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거리낌 없이, 서로 같아야 할 게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건 끈끈한 관계의 특약이다.
그리 날카롭지도 않고 그리 무디지도 않게. 걸리는 것 없이 지속되던 관계들이 샤프심처럼 똑똑 부러질 때가 있다. 스스로 닳아가는 연필인 줄 알았던 사람도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나면 그 자체로 샤프가 되곤 한다. 원하는 만큼의 진하기와 굵기를 골라 넣은 채,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서는 연약해 보이기 짝이 없는 가는 심을 리필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샤프를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은 심이 끝에 다다를 때 바닥에 대고 너무 센 힘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래 쓰려면 심을 왕창 넣지 않고 적정한 개수를 헤아려 넣어야 하는데 이때 기억해야 할 건 짧은 심이 긴 심에 밀려난다는 사실인 듯하다. 물론 그보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을 수도 있다. 밀려 나온 이토록 짧은 심이 한때는 긴 심이었다는 진실 같은 거. 이것저것 다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는 문제들.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도 모른 채. 이유 같은 걸 몰라도 더 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다고 믿은 채. 연필도 샤프도 이제는 잘 들지 않는데 이런 비유를 하고 있자니 식상하다.
썰물 때의 파도가 그러하듯 속에 있던 반복되던 말들이 드넓게 뻘을 내민 채로 밀려가고 있을 무렵. 오늘과 비슷한 마음이었지만 그날 저녁에는 오랜만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빨강, 주황, 노랑. 이 중에서…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시중에 나온 빨강, 주황, 노랑 파프리카. 그중에 주황색 파프리카가 제일 맛있다고 알려주던 사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흐릿한데 그 말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황색 파프리카와 신선한 것들을 들고선 "주황, 주황"거렸다. 아무도 못 들을 정도의 묵음으로, 발음에 따라 조용히 모았다가 내밀어 둔 입술이 벌어질 뿐인데 이상하게 경쾌해졌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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