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귀밑 3cm. 귓불에서 턱끝까지. 사람마다 낙차가 다른데 어떻게 이런 두발 규정을 지키라고 하는 걸까.
수업 시간이면 뒷목을 만지며 책에 코를 박거나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뒤통수 아래 면도기에 밀려나 짧아진 머리카락이 억세게 느껴지던 사춘기 초입. 전학 가기 전 여중에서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길이까지 머리카락을 기를 때쯤이면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어 있겠지 싶었는데, 그런 어림짐작과 달리 먼 곳으로 불쑥 이사를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에도 그다지 숫기 없던 나는 전학 가야 하는 날 아침까지 매일 같이 등교하던 단짝에게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조퇴를 하고 말았다. 그날 오후, 아무리 돌아보고 돌아봐도 찰랑이지 않는 짧은 단발머리로 차 뒷자리에 앉아 애써 웃는 아빠의 얼굴이 멀어질 때까지 손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먹만 꼭 쥔 채 울음을 참고 있었다.
전학 간 또 다른 여중에서 처음 하교 하던 날. 집 가는 방향을 몰라서 헤맬 때 그제야 마음의 바닥이 크게 헐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정말 익숙해지기 싫은 길이었는데 그 길을 찾아야 하루가 끝난다니.
이십 대가 되고부터 나는 중학생 시절 뒷목에 설핏 감춰진 짧은 머리카락들처럼 참 까끌까끌한 마음으로 살았다. 기를 만큼 기른 머리카락과 수더분해 보이는 겉모습에도 그 내면을 끝까지 감추지 못했다. 누구라도 가까이 오면 다 기르지 못한 생각을 빗질 하면서 애써 단정한 척을 하기도 했지만, 매일 아침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아야 개운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거품을 뚝뚝 바닥에 개어 가며 길고 짧은 생각들을 흘려보내기 바빴다.
아닌 척 했어도 살면서 몇 번은 상처가 다 낫기 전에 답답함과 가려움에 몇 번이고 딱지를 떼어 내는 아이들의 무릎을 감싸는 어른의 손 같은 그런 크고 묵직한 따뜻함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덤덤하게 쓰려고 해도 여전히 어디까지가 나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고백일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괜찮다. 오래전 어느 밤에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던 아빠가 동네서점 문이 닫기 전에 부랴부랴 사와서 안긴 몇 권의 책들. 뭐가 잘 되지 않던 시기의 아빠 목소리를 계단 삼아 몇 번이고 오르다 삐끗하며 내가 남긴 문장들이 알게 모르게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마음들을 많이 이어줬으니까.
매일 닦아도 막상 방바닥을 훔치고 나면 언제나 긴 머리카락과 먼지들을 건지게 된다. 이 작은 성장과 이탈들이 둘둘 뭉쳐 부피를 키워가면 크게 헐린 바닥을 메울 수 있을까.
서른줄에 서울에서 구한 세 번째 월세방에는 어린 시절에 살던 집에서 본 것 같은 노란 장판이 깔려 있었다. 동생들과 자주 들썩이며 놀던 비슷한 색의 커튼을 창가에 달고 베란다와 현관에서 반짝이던 주황색 불빛을 방 안에 켜 두던 밤. 비좁고 막다른 골목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오래된 가로등 같은 스탠드를 보았다.
주먹을 꼭 쥐고 이를 악 무는 잠버릇을 고치려고 생각이 나면 마음으로나마 속에 묻어둔 사연들에 깊이 인사하듯 숨 쉬는 연습을 한다. 항상 내쉬는 숨이 어렵다. 한숨으로는 고음을 낼 수 없다. 뭐든 깊이 들이키고 오래 내쉬는 용기가 필요하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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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가성
누군가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이 때로 위로가 되기도 하나 봅니다. 기억, 위로하는 말 하나 없이 위로하고 위로받는. 대단할 것 없는 기억들, 마치 서로 다른 타일 조각들을 깨어 붙인 바닥 같달까요. 가만히 따라 읽노라니 묘하게도 그 조각들이 서로 어울리네요. 요란하지 않으면서 또 따뜻하고요. 제 기억 속에도 잇대어 볼 비슷한 조각들이 있는지 혼자 더듬어 봅니다. 봄에 발표하실 시도 기대됩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
만물박사 김민지
일기가성님, 타일 줄눈을 새로 시공한 것만 같은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찬가지로 따뜻한, 안전한 연말연시 보내셔요. 지난번 글 읽고 구독료 대신 보내주신 빵값은 아꼈다가 새해에 읽고 싶던 책들 사서 읽는 데 보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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