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로서 아이. 감탄사로서 아이. 우리말이 아닌 영어나 중국어, 외국어로서 아이. 아이 하나를 생각하면서 몇 가지를 더 떠올릴 수 있을지 가늠하기보단 어른 눈에 아이로 보이는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최근 KBS에서 방영 중인 국민동요 프로젝트 <아기싱어>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란 누구인가. 아이는 정말 순수한가. 순수란 무엇인가. 아이는 꼭 순수해야 하는가.
출중한 미모가 어느 배우와 꼭 닮았다는 아이. 아이돌 못지않게 재기발랄한 아이. 프로그램 시청률을 견인할 것 같은 마스크와 끼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서 이렇다 할 수식 없이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나 싶었는데, 이어서 나온 아이들을 보면서도 귀엽고 맑다라는 표현조차 '아이는 이래야 한다'는 나의 감상이 더해진 것 같아 머쓱해졌다.
아이는 아이마다 다르지. 어떠한 수식이 붙든 쟤는 쟤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른이든 아이든 응당 어때야 한다는 생각이 각자의 결핍과 추구하는 가치로부터 발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에서 어떤 어른으로 자랐나.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떤 동요에 어떤 마음이 동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동요를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로 들었다면 어땠을지.
근래 tvN에선 <뜨거운 싱어즈>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사람들 눈에 익은 중장년 배우들이 대거 총출동하여 합창에 도전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이미 알고 있고 무덤덤하게 들어왔던 노랫말에 마음이 요동쳤다.
두 프로그램을 채운 몇몇 목소리가 '너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다른 식으로 알려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뭐라고 딱 확답할 수 없어도 눈물이 흐르는 걸 보면 대단히 소중한 무엇인 것 같은데. 뭘까. 완전히 사라진 걸까. 완전한 소실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어떤 것에 뒤섞여 그것만 골라내기엔 힘이 부치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 잔뜩 꼬여 버린 사람이 유일하게 순수해지는 순간은 의도하지 않는 시간을 사는 것.
뒤섞임 자체를 인정하고 몸과 마음을 더 뒤흔들며 나아가는 시간을 지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힘을 주게 된다. 잘하고 싶은 마음. 잘되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 들 수 있다. 괜찮다.
긴장으로 망칠 것 같을 때 억지로 더 힘을 주지 않는 것만 해도, 떨림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진심이 드러난다.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음 문제지만 지금의 문제를 꾸역꾸역 넘어가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끝에 다시 깨닫는 사람이 어른, 언제든 깨달아도 늦지 않은 사람이 아이. 지금의 나는 대체로 어른도 아이도 아닌 거 같은 느낌이 자욱하다. 이럴 때일수록 의도하지 않은 시간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