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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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2 | 조회 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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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마크 로스코의 그림  덩이와 덩이의 경계, 찢긴 한지의 테두리처럼 모호하지만 나뉘는 지점들. 그런 번짐들을 좋아한다. 잔뜩 번지는 것의 둘레를 꼼꼼히  잰다면 얼마나  선이 나올까. 새롭게 쓰고 있는 시에 그런 번짐을 두고 머뭇거리는 중이다.

자꾸만 번지는 무언가의 둘레를 재는 헛수고를 평생 정성껏 반복하는 것이  쓰는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시가 좋아졌던 순간은 우울이 번지던 성장기 때였다. 우울은  이상 나아질  없다는 무력함에 찾아오는 것인데, 우울이 번지던 순간에도  몸은 한창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무렵 인적 드문 한적한 곳에 있었다는  감정의 커다란 궤가 되어주었다.

스스로 어떤 상태인지.  속에 난무하는 생각들이 어떤 근원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는  어쩌면 개인의 인생에서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먹고사는  바쁘거나  자체로 안락하다는 인상을 주고받게 되는 가짜 휴식에 심취해서.  막상  시간이 주어진대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갈피를  잡고 어떤 것들을  바쁘게 채워  시간을 빠져나간다.

그러다 불쑥 세상이 던지는 큰일들, 주체할  없는 기쁨이나 슬픔 등을 안기고 마는 일들에 걸려 넘어져 넘어진 김에 알게 된다. 최근 러닝타임만 보고 지루할  같아 은근히 미뤄  영화 <드라이브 마이 > 봤다.    대학로에서도 보았던 연극 <바냐 아저씨>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그렸다. 안톤 체호프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을까. 

어떻게 하면 길고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갈  있을까. 특별한 방도란 없다. 소냐의 말대로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며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가 '번짐' 가만히 응시하는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일지  다른 분기의 삶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성실함을 믿을  있을 만큼만 너무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게 발휘하고 사는 . 그게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마주할 유일한 대책 아닐까.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추신, 다들 잘 지내셨나요. 어떤 번짐으로 지내고 계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번 봄에는 다양한 꽃들이 번지듯 피어나는 광경을 많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지난 레터에 말씀 드렸듯이 새로운 신작시를 보여 드릴 기회가 생겨 아래 링크를 달아 두었어요. 문학광장 문장웹진 3월호에 시 두 편이 실렸습니다. '홀가먼트'와 '구근류'라는 제목의 시인데요. 보풀이나 잔뿌리처럼 옅지만 넓게 자꾸만 일어나며 뻗어가는 뭔가를 생각하면서 쓴 시들이에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스한 날들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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