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가 빵빵한 프로젝트 견적을 보고 있으면 그저 신기하고 허망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이 소비재를 알리고, 보기 괜찮은 이미지를 보태어 지금 쓰기에 더 좋다고 어필하는 데에 쓰이고 있을까.
오늘 내가 출근해서 한 일을 적어 보면 이렇다. 웹사이트 메인에 걸릴 콘텐츠들을 선별하고 그것들을 각각 묶어줄 키워드와 설명을 보태는 카피 쓰기.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갈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안서 쓰기. 피드백 받기. 또 피드백 받기. 또또 피드백 받기. 그 사이 끊임없이 고쳐서 최종 승인을 받고 실행한 뒤 끝에도 보고를 잊지 않는 게 나의 일이다.
내 딴에 부지런히 고민하며 보고와 공유의 과정을 거쳐도 돈 주는 입장 앞에선 괜한 노력의 시간을 보낸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수두룩하다. 왜 단번에 믿어주지 않고, 왜 단번에 통과시키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쉽게 돈을 쓰기엔 그들 역시 각자의 책임감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나와 동료, 나와 상사, 나와 클라이언트, 나와 외주 근로자. 기본 서너 번 이상의 핑퐁이 계속된 다음에야 어렴풋한 끝이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방심할 순 없다. 언제 어디서든 크고 작은 문제가 터져 나올 수 있다.
모든 기획과 운영에는 대응의 시간이 따른다. 선택지도 전략적으로 내밀어야 한다. 결정권이 없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기간 내에 주어진 비용 안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와 이익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에이전시인이 에이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적당한 체념과 계속되는 쪼임에도 쫄리지 않는 마음인 것 같다. 아무리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아이디어가 수중에 있다 한들 그것이 상부 관리직이나 클라이언트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썰리고 썰리는 절차 안에서 맥없이 쓰러지기 쉬워서 그렇다.
디지털 콘텐츠 기획을 담당하면서도 짧고 굵게 치고 올라오는 프로젝트 덕분에 UX 관련 업무 지식을 쌓고 있는 요즘. 리뉴얼한 힙한 웹사이트들에 탑재된 ‘프로그레스바(Progressbar)’에 눈길이 갔다.
웹사이트에 놓인 프로그레스바는 로딩이 진행 중일 때 사용자가 얼마나 스크롤을 내려 보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다 왔다. 다 봤다. 욕봤다. 차분히 누운 모습으로 스크롤이 진행된 정도를 보여주는 것만 봐도 이상하게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인생에도 이런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누가 나의 생각을 이렇게 읽고 하나의 파일이나 사이트로 구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해야지. 내 손으로 이 기획의 멱살을 잡고 가는 수밖에. 조금 더 인도적인 차원의 업무 프로세스가 있을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당분간은 빠르고 정확하게 쫓기듯 살아갈 것이다. 마우스의 정중앙을 오가는 중지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고생이 많았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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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아닌연두
ㅠㅠ... 치열함이 {조금은} 가라앉는 가을밤, 시인님도 숙면하시길 바라요. S2
만물박사 김민지
아주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여전히 눈 뜨기 어려운 아침이지만 시월에는 조금 더 가열차게 시와 생활을 끌올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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