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17

2022.04.14 | 조회 505 |
0
|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끝이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쓸 일인가. 과연 시간과 돈을 들일 만한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잠시 거둘 수 있던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누운 풀들을 많이 봤다. 누군가 큰 손으로 쓰다듬은 듯한 오름에 올라 가르마처럼 잘 갈라진 넓고 좁은 길들을 내려보면서 나는 어떤 기판을 머릿속에 두고 납땜질을 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 갈 때 손깍지를 낀 듯한 모양의 구름 위로 뜬 붉고 둥근 해를 보았다. 그 해가 구름과 함께 하늘에 주홍빛으로 풀어지는 동안 운전대를 잡은 이와 들을 만한 노래를 골랐다. 그날 오전부터 안개가 짙게 깔린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던 우리 앞에 다시 짙은 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앞을 나서야 앞이 더 보이는, 나와 내 발치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조금 더 광활한 풍경은 못 봤지만 그나마 덜 덥게 덜 탄 얼굴로 비를 안 맞고 돌아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제주에서 이제 다 졌다고 생각한 벚꽃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세찬 비를 맞으면 제주와 비슷한 속도로 꽃이 질까. "서울에서 살았으면 우리 달랐어?" 서울로 돌아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흘러나오던 대사를 듣고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나직이 대답하며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을 보냈다. 잠시나마 서울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마음을 상기해봤다. 그때의 서울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런 질문들이 돌아왔다.

여전히 무엇을 하기에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곳인지. 나는 내가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존재라고 믿고 있는지. 돌아오자마자 너무 많은 의심을 했는지 젖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도로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적당한 햇볕 아래에서 키우고 싶은 씨앗을 올려두고 있으면 언제든 가벼워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오늘도 몇 달 뒤의 약속을 잡으며 살아 있는 게 아닐지. 나도 나를 잘 몰라서 하는 여러 선택들이 어쨌든 뭐라도 해보라고 이곳에 다시 나를 데려다 놓았다.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파프리카는 주황색이 맛있어
추신, 이번 글은 하루 늦었습니다. 오자마자 스프링클러처럼 무언가 쓸 수 있겠지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코로나19 후유증 중에 피로감이 있으니 그건가 생각했지만 여행지에서의 에너지를 생각하면 모든 게 핑계인 것 같아요. 그래도 만물박사 김민지는 "광야로 걸어가 알아 네 Home ground 위협에 맞서서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하던 제주의 에스파적 응원을 잊지 않고 열심히 쓰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루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이번에 '다층'이라는 문예지에 실었던 세 편의 시 중에 「이달의 토핑」이라는 시를 아래에 선물로 붙여 둡니다. 노란 이미지가 많이 묻어나는 시예요. 이틀 뒤인 4월 16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색이기도 하고요. 뿌리돌리기 마치고 다음주엔 약속한 시각에 메일 띄우겠습니다.
이달의 토핑 / 김민지
이달의 토핑 / 김민지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