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곰(water bear)이란 생물이 있습니다. 완보동물(緩步動物, tardigrade)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우리말과 영어 명칭 모두 '느리게 걷는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크기는 1.5mm를 넘지 않는 작은 생물인데 아주 작은 곰처럼 생겼고 8개의 다리로 느릿느릿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저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현미경 사진을 보면 귀엽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한데 어떤가요?
별것 없어 보이지만, 물곰은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데다 극한 환경에서도 좀처럼 죽지 않는 엄청난 생명력을 갖고 있어서 유명해진 동물입니다. 위키피디아의 소개에 따르면 섭씨 150도의 고온, 영하 272도(절대온도 1켈빈!)의 극저온, 대기압의 6,000배에 이르는 고압 환경, 공기가 거의 없는 고진공, 치명적인 수준의 방사능을 견딥니다.
수생 생물이니 탈수시키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수분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스스로를 건조한 다음 동면하기도 하는데, 말라붙은 이끼 조각에서 120년 동안 동면한 끝에 살아난 개체가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심지어 우주공간에 꺼내 놓아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고 해요. 이처럼 놀라운 생명력 덕에 대중문화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데, 국내 매체의 예를 들자면 웹툰 <덴마> 3부 294화에서 "인간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실마리"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막강한 생존 능력 때문에 물곰은 온갖 괴상한 실험의 피험체가 되곤 합니다. 그중에 가장 특이했던 사례로는 2019년 이스라엘의 베레시트(Beresheet) 달 탐사선 사건이었어요. 베레시트는 정부 소속 기관이 아닌 곳에서 발사한 최초의 달 탐사선이었는데요, 별다른 탐사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일종의 타임캡슐을 달에 실어 보내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이 타임캡슐에는 얼려서 동면시킨 물곰 수천 마리도 실려 있었고요.
베레시트는 착륙 예정 지점은 달 북반구의 '평온의 바다(Mare Serentatis)'였습니다. 하지만 착륙 도중에 자이로스코프가 오작동해서 충분히 속력을 줄이지 못했고, 와중에 베레시트와의 통신이 잠깐 끊기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통신이 복구됐을 때는 이미 베레시트가 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상태였고 결국 베레시트는 달 표면과 정면 충돌해서 파괴됩니다.
아래 사진은 NASA의 달 정찰 위성(Lunar Reconnaissance Orbiter)에서 베레시트의 충돌 전후에 촬영한 사진인데요, 붉은색으로 표시된 원 안에 충돌 흔적이 선명한 흰색으로 보이죠?
문제는 물곰입니다. 베레시트에 실려 있던 물곰들이 설마 충돌에서도 살아남은 다음에 달 표면으로 슬금슬금 기어나가면 어쩌죠? 설마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물곰이 살아나가서 달 표면을 점령하고 생태계를 꾸려버린다면 우리는 우주 최초의 생태계 교란종을 달에 뿌린 걸지도 몰라요. 베레시트 발사를 추진하던 이스라엘 측에서는 물곰을 실어 보냈다는 사실을 발사 이후에나 공개했고 그래서 더 논란이 되었습니다.
저 물곰들이 정말로 살아남았는지는 달에 가 보기 전까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과학자들은 물곰의 생존 가능성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결국 2021년 5월 11일에 흥미로운 실험 결과 하나를 학술지 우주생물학(Astrobiology)에 보고했습니다. 결론만 짧게 얘기하면, 베레시트의 물곰은 다 죽었을 거라고 해요.
영국 켄트 대학의 연구진의 이번 실험은 제법 단순합니다. 동면시킨 물곰 2~4마리를 나일론 탄환에 실은 다음 총을 쏴 보는 거예요. 연구진은 500m/s의 속도로 시작해서 최대 1,000m/s의 속도에 이르는 다양한 속도로 물곰 탄환을 쏘아 봤는데, 800m/s의 속도에 이르면 물곰이 슬슬 죽기 시작하고 900m/s 이상의 속도로 탄환을 쏘았을 때는 어떤 물곰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베레시트가 달 표면에 충돌할 때의 속도도 초속 수백 미터 정도 되었을 텐데, 물곰이 담겨 있던 금속 프레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석해 보면 실제로 물곰에 가해진 순간 압력은 훨씬 더 강했을 거라고 합니다. 연구진의 결론에 따르자면 베레시트에 실려 있던 동면한 물곰은 모두 죽었을 거예요.
이번 연구 결과는 2019년에 달에 쏘아진 물곰의 생존 가능성 말고도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천체에서 다른 천체로 생물이 넘어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실마리지요.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발생했을까요? '포자범재설(Panspermia)'이라는 가설에 따르면, 우주 이곳저곳에는 생명의 포자(sperm)가 널리 퍼져 있고, 이 생명의 씨앗은 소행성이나 혜성 따위를 타고 다른 천체로 날아가서 생명을 싹틔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소행성에 묻은 미생물이 지구에 떨어져서 최초의 생물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포자범재설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소행성에 실려서 지구와 정면충돌하고도 살아남을 만한 미생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의 충돌 속도는 대략 11,000m/s 정도로, 물곰의 생존 한계보다 열 배는 높습니다. 물곰이 소행성에 실려 오지는 못했겠네요.
하지만 물곰보다 단순한 일부 미생물은 최대 5,000m/s의 속도에도 살아남았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행성의 정면충돌 속도가 11,000m/s라고는 해도, 소행성이 조각나면서 어떤 조각은 그것보다는 느린 속도로 충돌하기도 할 테니까 생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게 이번 논문 저자들의 주장이에요.
사실 좀 더 재밌는 경우는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인 것 같습니다. 엔셀라두스의 지각 밑에는 물과 메탄이 섞여서 흘러 다니는 슬러시 같은 바다가 있고, 가끔 지각의 빈틈을 따라서 이 슬러시가 화산처럼 폭발하곤 합니다. 저온 화산의 이 폭발 장면은 카시니-하위헌스 토성 탐사선이 아래 영상처럼 촬영한 적 있습니다.
저온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슬러시 제트는 초속 수백 미터 정도의 속도라고 합니다. 물곰 정도면 충분히 살아남을 속도지요? 만약 엔셀라두스의 지하 바다에 생명체가 살고 있고, 이들 중 일부가 물곰 정도의 생존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면, 엔셀라두스의 바다를 직접 조사해 보지 않더라도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제트의 성분을 분석해서 생명이 존재하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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